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병원에 간 서른 아홉 사촌 남동생에게 내린 진단은 '척수액 감소 증후군'이었다. 척추의 관 속에 들어있는 물이 어딘가에서 새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는 곳이 어디인지와 그에 맞는 시술을 할 때까지는 꼼짝 말고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동생은 환자 같지 않은 얼굴로 누워있다가도, 통증이 찾아오면 정말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 했다.
환자는 더했겠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 병명이 낯선 것은 물론이고 몸 안에서 무언가가 새고 있다는 표현에 한마디로 황당했다. 남편의 갑작스런 발병에 얼굴이 반쪽이 된 사촌 올케는 울 듯한 얼굴로 내게 하소연했다.
"우리한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가만 눕혀 놓고 씻겨 주고 면도해 주고 하다보니까, 남편에게 좀더 잘 해 주라고 이런 일이 생겼나 봐요."
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 동생은 어제 비로소 척수액이 새고있는 부위를 찾아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곧장 시술을 받았다. 누워있기만 하다가 이제 앉는 연습부터 해보고 별 이상 없으면 며칠 내로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정신없고 황망한 열흘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만나는 병은 무엇일까.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함정 혹은 복병 같은 병은 과연 우리 인생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1958년 생.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 일곱인 필립 시먼스는 서른 다섯 되던 해에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린다. 루게릭병은 근육이 위축돼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원인 불명의 불치병이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이 병을 앓고 있으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 역시 루게릭병 환자였다.
천 미터 이상의 산봉우리 마흔 아홉 개를 오른 필립 시먼스는 이제 '날마다 부서지는' 몸으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으며, 아무리 기뻐도 더 이상 두 팔을 들어올릴 수 없다.
자신의 에세이 열 두 편을 모아 놓은 책〈소멸의 아름다움〉에서 그는 일관되게 "낙법 배우기(Learning to Fall :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를 이야기한다.
꿈의 상실과 좌절, 체력 저하와 질병,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이 모든 것이 '떨어짐(falling)'이며, 우리 모두 이미 경험해온 이 떨어짐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고 또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떨어짐을 배우고 실천하는 방식은 내버리기, 받아들임, 고독, 침묵, 놓아버리기, 영성(靈性), 무위(無爲)의 기술이라고 정리한다.
또 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절충적이고 포괄적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덕분에 기독교나 불교나 가톨릭 등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의 글과 생각의 폭은 넓고 편안하다.
서른 다섯, 인생의 절정기 초입에서 맞닥뜨린 병 앞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깊어지며 한없이 넓어진다. 병과 죽음 앞에서 주저앉으며 무너져 내리는 대신 자신의 자리를 자기 내면에 만들고는 생각을 완숙하게 익혀 나간다.
생각의 깊이와 폭에다가 속 사람에게서 솟아나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그 완숙함은 절로 향기를 풍긴다.
땅을 똑바로 걷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은 그는, 자신의 힘으로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아침마다 일어난다며 우리가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인 현재의 순간에 집중할 것을 자신의 경험을 담아 당부한다.
병은 그의 인생을 다시 디자인했다. 우선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도록 했고, 원래 가지고 있던 영성 추구의 심성을 심화시켰으며, 친구와 이웃의 사랑과 보살핌을 짙게 체험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생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따지는 것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인지. 바닥까지 '떨어짐'을 배운 자만이 가득 찬 인생을 누린다.
우리는 흔히 병과 마주칠 때, 잘못한 일은 없는지 먼저 생각해 본다. 그러고는 죄책감과 후회, 비탄, 외로움, 절망, 상실로 가슴을 채우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병을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알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은 필립 시먼스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는 병을 통해 전해오는 무언가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흔히 중년은 전반생(前半生)을 보내고 후반생(後半生)을 디자인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인생의 리모델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서른 아홉, 탄탄한 재능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예쁜 가정을 꾸려 부러워할 것 없던 사촌동생도 이렇게 병을 통해 '떨어지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또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임을 나 역시 배웠다.
자신의 불치병을 통해 인생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 필립 시먼스. 그는 자신의 성장과 성숙에 머물지 않고 그 경험을 나누어주었다. 그래서〈소멸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소멸로 그치지 않고, 떨어짐을 통한 거듭나기가 되어 사람들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