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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연했던 단편영화 <소시지 먹기(Eating Sausage)>의 감독 지아(Zia)도 아내의 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한 달 전쯤 우리 집에 왔을 때 아내에게 영화에 쓸 음성 녹음을 부탁하더군요.
영화 장면 중에 여주인공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는 장면들이 몇 군데 나오는데, 그 장면들에 사용할 영어회화 테이프를 직접 녹음해 음향효과로 집어넣기 위한 것이랍니다. 그 영어회화 테이프에서 한국말로 영어회화를 지도하는 영어 선생님의 육성을 아내의 목소리로 담으면 어떻겠느냐는 거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선발 오디션 때만 해도 같이 참가하자는 나의 꼬임에도 불구, 아내는 얼굴에 조금 낀 기미와 수영복을 입으면 그대로 드러날 몸매를 걱정하며 한사코 거절했지요. 그런데 촬영이 다 끝나고 후반 작업도 거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지아의 이 녹음 부탁에는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나오는 것이니 부탁을 들어줄 만도 했겠지만, 그동안 지아를 여러 번 만나면서 호감을 갖게 되었기에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비록 목소리만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도 영화 출연이라고, 아내는 열심히 연습을 하더군요. 아내는 지아가 준 원고를 한국말로 정성스럽게 다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것을 소리 내어 크게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시내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이 있었던 겁니다.
유리창 너머 마이크 앞에 선 아내는 다소 긴장되는지 자꾸만 헛기침을 합니다. 지아의 녹음 시작 신호가 떨어지고 아내는 원고를 읽어나갑니다. 처음에는 목소리의 톤이 들뜨고 원고를 읽어 나가는 속도도 고르지 않더니, 같은 원고를 몇 번 읽어나가는 동안 아내의 목소리는 자리를 잡았고 속도도 일정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음향 기사와 지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릅니다. 나는 엄지와 검지 끝을 이어 동그라미를 만들어서 아내에게 흔들어 주었습니다. 함께 온 딸아이 동윤이도 엄마의 목소리 연기가 마음에 드는지 나를 보고 씩 웃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녹음을 끝내고 다시 한 번 하자고 하는군요.
그래서 5분이 채 되지 않는 분량의 녹음을 하는데 1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또 편집해서 넣게 될 테니, 실제로 영화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단지 몇 초 동안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엔딩 크레딧에 아내의 이름이 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되겠지요.
그래도 나는 내 생애의 최초이자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이 영화에 기왕이면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함께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아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아는 당연하다는 듯, 엔딩 크레딧에 아내의 이름을 올려주기로 했습니다.
지아는 6월말까지는 <소시지 먹기>의 후반 작업을 모두 마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7월 중에는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출연진들과 스태프들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모두 불러서 첫 공개 시사회를 갖겠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이제 아내는 남자 주인공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목소리 연기를 한 성우의 자격으로서 참가하게 되었으니 한층 더 기쁘고 당당하겠지요.
그리고 나서 지아는 베니스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 영화제의 단편영화 부문에 <소시지 먹기>를 출품할 계획이며, 그 중에는 한국의 국제영화제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비롯해서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내가 출연한 단편영화 <소시지 먹기>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이제 거기에 아내의 목소리까지 합세했으니 영화 <소시지 먹기>는 정말 아내와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보다도 더욱 소중한 선물은 낯선 타국에서 이 영화를 통하여 맺게 된 젊은 여자 감독과의 우정일 것입니다.
이제 거의 모든 작업이 끝난 우리의 영화 <소시지 먹기>의 엔딩 크레딧에 새겨질 나의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스물 여섯 살의 젊은 여자 감독 지아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