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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건전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도저히 7년간의 전투를 치러 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운동으로 단련된 이답게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이며, 웃을 때 보이는 치아마저 그의 생각 만큼이나 반듯하게 고르다. 지난해 만났을 때는 평교사였던 권오일(42)씨는 올해 에바다 학교(교장 손현득)의 교감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 승진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이제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게 되었고, 교감이 된 그는 여느 학교 교감들이 그러하듯 학교 발전, 그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통합교육을 위한 학교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저희들의 꿈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잡게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배울 터전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포부와 감동이 어려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처음 사태가 시작되었을 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이들이 지금 고3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습니다. 그게 가장 가슴 아파요."

아이들의 상처를 안고 가는 길

▲ 권오일 교감
ⓒ 인권위 김윤섭
에바다 학교 문제는 지난 1996년 11월 농아원생들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더는 쓰레기통을 뒤질 수 없다"며 재단의 비리와 인권유린을 고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조사 결과 3억3000여만원의 국고지원금 횡령, 13명의 친·인척 유령 직원, 88명의 장애인 이중 등록 확인, 제본 공장 강제 노역 및 임금 횡령, 청각 장애아 70여 명 인신매매 등 옛 재단의 악행들이 드러나게 됐다.

그리고 2001년 새로운 이사진이 이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정상화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1996년 이후 아이들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처음 학교에 돌아왔을 때 운동장은 잡초투성이에 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문짝은 어슷하게 덜렁거리고 건물은 언제라도 내려앉을 것 같았다. 생명 아닌 것들도 저리 상흔을 안고 있는데, 자라나는 아이들의 상처는…. 학교 이전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진정 새출발을 하는 듯해서 반가웠다.

권 교감은 아이들 앞으로 흘러가 버린 시간이 무척 안타깝다. 체육교사로 아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던 그에게는 기막히는 사연이 있다.

"아이들이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으니까요."

탁구 국가대표로 메달리스트가 되어 연금을 수령하게 된다면 장애인 자립조건으로는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아까운 탁구선수들이 묻혀 버린 셈이다. 권 교감은 전에 다른 농아학교에서 탁구코치로 일하다가 1993년에 에바다 학교로 왔다.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그는 장애학생들에 대한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는 사람이다.

"농아는 지능이나 움직임에 장애가 없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청각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있지요.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적어서 그렇지 절대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한 거지요."

새벽에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퇴근시간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고 선수들 뒷바라지에 자신의 월급봉투를 털어 넣는 것이 오히려 기뻤다. 에바다의 아이들은 나가는 탁구대회마다 메달을 쓸어왔다. 얼마 되지 않아 비장애아들과 겨루는 전국탁구대회에 나가 당당히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장애인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도 있다.

권 교감은 몇 년 전의 일을 눈앞의 일인 양 신이 나서 얘기한다. 그때 아이들은 탁구라켓으로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장애를 딛고 선전한 선수들을 향해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자 재단측은 태도를 바꿨다. 20여 년간 저지른 비리와 부패가 노출될 것을 두려워한 학교운영자들은 아예 탁구실 문에 빗장을 지르고 대못을 박았다. 아이들의 꿈, 그런 것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 청각장애인 국가대표 탁구선수 모윤솔(왼쪽). 에바다 투쟁이 시작될 때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윤솔이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 인권위 김윤섭
7년간 이어진 에바다 투쟁의 불씨가 권 교감에게 본격적으로 당겨진 때는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납득할 수 없는 결정에 항의하자 재단측은 온갖 모함과 욕설로 그를 몰아붙였다. 게다가 재단의 비리와 원생에 대한 인권유린이 계속되자 결국 1996년 11월 학생들은 촛불을 밝혔다.

"우리는 길면 두 달, 정말, 아주 넉넉하게 잡아서 석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기약도 없이 교사들과 아이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쫓겨다니며 투쟁을 계속했다. 남의 교회에 '숨어서' 농성하고, 한국농아인협회 빌딩 지하에서 다섯 달이나 지냈다. 그때 교사들은 서울에서 학교가 있는 평택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늦게까지 회의하느라 새벽 두 시 이전에 자 본 일이 없어요. 그래도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났는데 여교사들은 남교사들보다 더 일찍 일어났어요."

권 교감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씩씩하게 견디어 낸 그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우리나라 장애인 운동의 상징이 된 에바다 투쟁에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함께 해온 이는 권오일 교감만이 아니다. 그러나 매번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한 사람은 아마 그뿐일 것이다. 상황이 좋지도 않은데 더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라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상황을 만들려고 우리가 이제껏 싸운 거 아니냐. 오히려 잘됐다. 바닥을 쳤으니 더 나빠질 리는 없다."

'언젠가 이긴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7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은 아이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코뼈가 내려앉고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는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오히려 잘된 경우'라고 했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맞았으니 잘되었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저들은 이제 명분이 더욱 없어지게 됐다. 일이 잘되려고 이런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 맞는 것은 아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아이들이 우리 교사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데 돌리고 때리는 걸 보는 게 가슴이 아팠지요. 아이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하는 상황에 있었으니까요."

그에게는 투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없다. 결연한 의지나 각오보다는 그냥 순하고 자연스러운 힘이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힘은 아마 오래 전부터 길러진 것 같다. 유신 치하에서도 올곧은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던 권영채 목사가 부친이니 옳고 바른 것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는 삶의 자세는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세 번이나 해결해 줄 것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지지부진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십 개 단체들이 힘을 모아 대응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에바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걸 알면서 버티고 앉아 싸우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도 힘들었을 게다. 그럴 때 동료이자 동지인 그의 아내가 힘이 되어 주었다.

▲ 에바다 정상화 1주년 기념 체육대회에서 응원하는 권오일 씨
ⓒ 인권위 김윤섭
"당신은 이 싸움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르다고 생각하느냐? 옳다면 뭐가 두려운가? 우리가 지금 길바닥으로 쫓겨난다 해도 우리는 살 수 있다. 끝까지 가라."

해직과 파면은 오히려 가볍게 여겨지던 세월 속에서 그와 동료들을 견디게 한 힘은 '오늘'에 있었다.

"힘들 때 말했지요. 우리는 오늘 하루를 만들어 냈다. 비록 아무런 결과 없이 오늘이 지나가도 오늘이 모여 언젠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 폭발력을 우리는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재밌게, 마음 편하게 지내자."

그리고 그는 확신했단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옳은 것이니까. 언젠가 이긴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결국 그의 뜻대로 그들은 이겼다. 옳았기 때문에 이긴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하지만 앞날이 더욱 두렵다.

"이제까지 많은 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왔는데 잘 해내야지요. 힘을 얻은 이들이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의 수첩 첫 장에는 '첫마음'이라고 크게 쓴 글자가 적혀 있다. 에바다를 위해 싸우기로 한 그 '첫마음'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제가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연습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해아래집'아이들과 함께 안개 낀 강둑을 뛴다. 새벽 달리기를 하는 걸음마다 그는 정의를 익히고 불의를 버리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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