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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금강산가극단과 윤도현밴드가 함께 한 '오 통일! 코리아'의 공연 연출자인 탁현민씨가 공연을 준비한 4박5일 기간 동안 느낀 점들을 글로 보내왔습니다. <편집자주>
초등학교 때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새 학교가 지어지고 어느날 갑자기 친구들 반 정도가 새 학교로 전학을 갔다. 마지막 조회 시간에 떠나는 아이들과 남아 있는 아이들이 울어 대는데 온 학교가 눈물 바다였다. 새로 생긴 학교는 기존 학교에서 한 10분쯤 되는 거리였고 새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모두 친한 건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슬프고 가슴이 아렸는지. 그리고 그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지난 26일 '오! 통일 코리아'에서 함께 공연했던 금강산가극단이 6월 30일 출국했다. 그날 공연에서 마지막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영상이 나올 때 많이 울었다는데 공연장 콘솔에 있던 나는 보지 못했다. 게다가 공연 내내 음향과 영상, 특효에 신경 쓰느라 지친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인사하러 가는 길에 풍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성악부 출연자가 보였다. 베이스를 치던 가극단 안성대 국장의 조카도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자꾸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출연진들이 빠져나가는데도 무대에 남아 악수를 하던 무용부 김수미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면서 한손으론 관객의 손을 잡고 한손으론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찍고 있던 iTV 서혜승 PD와 <조선신보> 김설자 기자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공연을 연출했던 평양예술대학 3학년 김재현형이 무대 상수 흑막 안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 때처럼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주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울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옆 칸에서도 어떤 남자가 울고 있었다. "꺽꺽" 숨이 넘어갈 듯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30일 공항으로 배웅을 가야 하는데 난 가지 않았다. 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번에 가까이 지낸 가극단 단원 중 하나가 "나는 이남에 맘대로 들어 올 수 없으니 오빠가 일본에 오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할 자신이 없어졌다.
무슨 신파도 아닌데 재현형은 어젯밤 내내 나를 집에 가지 못하게 붙잡았고, 그런 나는 같이 있으면 울어 버릴 것 같아 형을 혼자 남겨 두고 집에 와 버렸다. 그리고는 혼자 있을 형을 생각하며 또 울었다. 4박5일 동안 고마웠다고 선물을 건네는 무용부 김수미를 호텔에 두고 나오면서 잘 가라고 말도 못했다. 다시는 이렇게 가슴 아린 공연, 하기 싫다.
오! 통일코리아,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공연이 끝나고 울음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지만 도대체 왜 눈물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공연 내용에 대한 아쉬움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못마땅함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공연 연출가들이 그렇겠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공연에서 사고란 늘상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닌데 마지막 곡이 끝나고 이번 공연의 지난한 과정이 영상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났다. 그러나 고백컨대, 눈물은 마지막 협연이 시작되던 <철망 앞에서>를 부르던 그때부터, 아니 가극단이 입국하던 그 때부터, 이 공연을 위해 그들을 만났던 그때부터 이미 내 마음에 흐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정서나 지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한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었고 '그들'이 장구춤을 추든, 사물놀이를 하든 개량 악기로 어떤 연주를 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들이 까탈스럽지 않기를, 모쪼록 '통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하품을 해대는 나 같은 사람들이 윤도현밴드의 공연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나는 금강산 가극단의 입국을 이벤트로 알리면서 '신나는 통일'이니 '남·북·재외교포 젊은 세대의 뜨거운 만남'이니 하는 말들을 줄창 떠들어 댔다. 그리고 뭔가 '짠'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인터뷰를 하면서도 스스로는 짠하기는커녕 복잡하고 고민스럽기만 했다. 그 복잡한 공연 기획 과정과 그보다 두배쯤 복잡한 가극단의 생전 처음 보는 악기들, 그리고 가극단이 말하는 '우리식' 그러나 '이북식'의 의상과 노래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민거리는 최종 시연회를 보러 도쿄에 있는 금강산가극단을 방문했을 때 나에게 떨어졌고 그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함께 나를 괴롭게 했다. 아예 의상을 우리가 맡아 제작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내가 기능적으로 그들과 만나고 있을 때,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번 공연의 음향이니 무대니 하는 것보다 "우리가 함께 공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아, 이런 사람들이 제발 현장에서 까탈을 부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철망 앞에서>가 보여준 남과 북의 변화
사실 이번 공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극단의 무대와 협연이었다. 가극단 공연의 내용은 내가 개입할 여지가 적어 그저 잘 만들어 오길 기대하는 수준이었지만 협연은 좀 달랐다. 지난 2002년 공연에도, 또 2001년 평양 공연에서도 협연 곡 때문에 공연 성사 여부까지 흔들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협연곡 <오! 통일코리아> <아리랑> <우리는 하나> 말고 무언가를 더해야 하는데 양쪽 다 협연을 연습할 시간이 공연 전날 리허설밖에는 없었다. 이번 공연 하나를 위해 새 곡을 만들기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철망 앞에서>가 유일한 대안이었고 가장 적합한 곡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곡이 지난 2001년 평양 공연 때 분단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노래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는 맥락과 상관없이 도식적으로 해석된 '가사'로 인해 함께 불리지 못했다는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선곡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어찌하다 어렵게 가극단 쪽에 말을 건네니 역시 문제가 있다며 결정을 미루었다. 대충 예상했던 일이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도로 건전하고 소박하게 마무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연회의 마지막에 가극단장님과 그쪽 연출가가 <철망 앞에서>를 공연 레퍼토리에 넣고, 가사도 원래대로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평양예술대학 3학년 늦깎이 학생인 김재열(35·가극단 연출가)은 기쁜 목소리로 "우리끼리 이렇게 양보해야지요"하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사실 난 좀 놀랐다. 2002년과 2003년에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그들의 완고함(?)이 많이 누그러져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쪽의 정서를 이해하려 애쓰는 그들의 태도도 새롭게 다가왔다.
가극단의 전향적인 태도와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로 서로가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거의 무조건 받아들였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협연의 가사로부터, 무대의 배치, 연주의 순서, 조명의 연출, 특수효과, 영상까지. 김재열형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나는 그것을 먼저 하거나 그 요구에 맞추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왕십리에서 통일을 이루다
가극단이 남한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앞의 두번은 국정원 등 관계기관의 밀착 경호 때문에 덕수궁, 경복궁도 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가극단의 안승대 국장은 "이번 공연도 공연이지만 공연 끝난 다음에 책임지고 접대해야 됩니다"라며 많은 기대를 하는 듯했다. 꼭 그 말이 아니어도 나 또한 공연 내용 만큼이나 이들의 체류 일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문 첫날에는 공항에서 이들을 맞고 임진각을 보고 나서 인사동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함께 밥을 먹던 단원 중 하나가 귓속말로 편의점에 가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연 관계자, 윤도현밴드, 가극단원들 5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이들을 몰래 빼내 편의점으로 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기한 듯 '이남'의 물건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어떻게든 이들을 밤에 '빼내' 홍대와, 왕십리 곱창집, 압구정동에 데려가리라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박5일 체류 기간 내내 우리는 연습이 끝난 다음, 공연이 끝난 다음날, 떠나기 전날 홍대에서, 압구정동에서, 왕십리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주말의 서울 거리와 인사동, 그리도 동대문 두산타워 앞에서 공연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 같은 건 곱창전골에서 함께 섞여 목구멍으로 들어가 버렸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경계들이 소주보다 쉽게 넘어가 버렸다. 그날 밤 왕십리는 바로 통일의 거리요, 감동의 물결이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고 마지막 날이 밝았을 때 신기하게도 우리는 아무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수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 했던 것이었을까. 같은 포즈의 사진을 수십 장씩 찍고 불법적으로 이메일을 교환하고 자주 연락하자는 모의를 하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4박5일 만에 이뤄낸 통일
마지막 날 밤 김재현형의 방 안에서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기려 하고, 자기의 입장을 고집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우리가 만든 이 한판의 공연처럼 서로 가진 것을 숨기지 말고 서로 양보하려 하고 상대가 무언가를 원할 때 그대로 내준다면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그때는 우리가 만나서 다시 헤어져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거라고. 오늘 이렇게 서럽게 둘이 붙잡고 우는 이유는 우리가 앞서서 통일했기 때문이라고…….
남북의 통일 문제를 다루는 고위급 인사들이여. 이번 공연을 함께 만들었던 스태프들과 금강산가극단, 그리고 윤도현밴드는 4박5일 만에 통일을 이루어냈다. 뭣들 하시는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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