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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지난 봄부터 고사리며 산나물을 캐는 경쟁자가 생겼습니다. 고사리는 많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7년 넘게 뒷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이제 어느 산기슭에 어떤 산나물이 나고 또 어느 후미진 곳에 고사리가 많이 나는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헌데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고사리 밭을 그 누군가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산에 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한발 먼저 고사리 밭을 훑고 지나간 흔적을 남기곤 했기 때문입니다. 내내 뒷북만 치고 있었습니다.

고사리 밭 임자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매일 같이 솟아오르는 고사리는 먼저 꺾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나보다 앞서 먼저 고사리를 꺾어 가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자격도 할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손가락만큼 올라온 어린 고사리마저 남김없이 싹쓸이하고 있어 화가 났습니다.

한나절만 지나도 두 배 이상 자란 두툼한 놈을 꺾을수 있을 텐데 그걸 참지 못하고 고사리 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고사리뿐만 아니라 미역취며 취나물 등 산나물들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누군가를 뒤쫓으며 이삭줍기를 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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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피나무를 발견한 기쁨

그렇게 늘 뒷북만 치고 있던 어느 날, 헐렁한 망태기로 산을 내려오다가 문득 대나무 숲 사이에서 연녹색의 잎을 피워 올리는 낯익은 약초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분명 오가피나무였습니다. 지난해 가을 동네 사람들이 몽땅 뽑아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오가피나무가 확실했습니다. 그동안 고사리에 눈이 멀어 오가피나무는 미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캐갔던 바로 그 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오가피나무가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잎을 피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뿌리까지 몽땅 캐 갔다고 했지만 여전히 몇 가닥의 뿌리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새싹을 틔워 올렸던 것입니다.

▲ 지난해 가을 동네사람들이 다 캐갔다고 여겼던 오가피 나무 뿌리에서 다시 싹이 돋았습니다
ⓒ 송성영
오가피나무 가지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멀뚱하니 쳐다보았습니다.
"고사리는 없고 웬 오가피나무?"
"고사리가 오가피나무로 변신했지"
"작년에 오가피나무 다 캐간다고 동네 어른들에게 화를 내더니. 바로 그 오가피지?"
"그려, 그 오가피여"
"동네 사람들이 뿌리도 남김없이 싹 캐갔다더니 남아 있네?"

나는 적당히 둘러댈 말도 없고 하여 잎이 다섯 개인 여린 오가피 잎을 씹었습니다. 등교 준비를 하던 아이들이 아빠가 멀쩡한 잎을 씹어 먹자 묘한 표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빠 그거 그냥 씹어 먹어도 되는겨?"
"그~럼, 니들도 한번 먹어 볼텨?"

녀석들은 오가피를 먹으면 힘이 강해진다는 말에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씁쓰름한 맛의 오가피 잎을 씹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녀석들에게 말했습니다.

"조그만 기달려봐, 지금은 쓰지만 조금 있으면 입안이 달콤해질 거여, 콜라나 과자 같은 건 처음엔 달콤하지만 먹구나면 입안이 찝찝하고 별로지? 그런데 이 오가피나무 잎은 마술을 부린다, 처음엔 쓴 맛이 나지만 나중엔 달콤한 향기가 난다"
"아빠 이거 먹으면 정말루 힘 쎄져?"
"고걸 말이라고 하냐! 인스턴트 식품들하구는 상대도 안되지"
"그럼 장비나 관우도 옛날에 이런 거 먹었어?"

삼국지에 푹 빠져 있는 큰 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마 관우도 그랬을 거여, 옛날에 인스턴트 식품 같은 건 없었으니까, 오가피 같은 힘세지는 거만 먹었겠지"

자동차가 학교 앞에 도착할 무렵 두 녀석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럽니다.
'어? 정말로 달콤한 향이 나네. 아빠, 나 이거 학교 갔다 와서 또 먹을래"

▲ 오가피나무잎을 씹으면 처음엔 씁쓰릅 하지만 조금있으면 입안에 달콤한 향이 번집니다.
ⓒ 송성영
세상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조그만 쓴맛을 인내하고 나면 달콤한 일들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오가피나무 사건'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가피나무를 캐 가던 동네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한해도 지나지 않아 다시 싹을 틔운 오가피나무, 어차피 캐 갈 것을 몸보신하시라고 좋은 말을 건네 그냥 지켜볼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동네 사람들이 오가피나무를 캐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작 찻물이나 끓여 먹고 있는 나보다는 더 절실하게 오가피나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고사리를 꺾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사리는 해마다 그 자리에 다시 올라옵니다. 나는 고사리를 꺾어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런 힘든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올해 꺾지 못하면 이듬해에 꺾으면 됩니다.

하지만 매일 같이 고사리 밭을 싹쓸이했던 그 누군가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어린 고사리 마저 꺾어야 했던 말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맛있는 반찬을 해 먹거나 바싹 말려 두었다가 누군가에게 인심을 쓰고자 고사리를 꺾고 있지만 그 누군가는 사정이 전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고사리를 말려 장에 내다 팔아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누군가에게는 고사리가 밥이 되거나 손주 녀석들의 학용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좀더 욕심껏 고사리를 꺾게 되면 그 누군가는 그만큼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적게 먹는 만큼 그 누군가의 고픈 배가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많이 먹고자 한다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대자연 속의 그 누군가는 그만큼 고통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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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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