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시민운동을 변화시킨다
대변형 시민운동이 급속하게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만들어낸 공간에서 자라난 지금의 다양한 시민운동은 모든 단체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과 만나면서 급격하게 대중성을 획득하고 동시에 90년대 시민운동이 보여준 운동방식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2002년 대선에서 드러난 노사모나 서프라이즈 등 특정한 정치적 경향을 지닌 인터넷 정치단체들은 시민들의 근대적 정치개혁에 대한 욕구를 조직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 2000년의 시민단체를 대신하였다. 이들은 정치개혁의 주체이자 특정 정치세력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2004년에는 탄핵정국을 매개로 하여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을 선택함으로써 근대적 정치지형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광화문에 모인 20만에 가까운 시민들은 탄핵무효범국민행동으로 모여든 시민단체들만의 힘으로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실제 조직과정에서 역할을 한 것은 인터넷의 수많은 자발적 카페와 블로그, 게시판,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들이었다.
의사소통 수단이 대중화되고, 정보의 유통속도가 실시간에 가깝게 이루어지면서 개인들이 내리는 결정도 그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시민단체들은 이들 앞에서 이들을 조직했다기보다 시민단체들보다 먼저 거리에 나선 이들과 발걸음 맞추면서 시민운동 역사상 가장 대중적 운동과 결합한 셈인지도 모른다.
이런 징후는 이미 2002년에 볼 수 있었다. 미선 효순양 추모와 주한미군의 범죄에 대한 대응은 인터넷의 수많은 카페와 게시판이라는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지금 보편화된 블로그는 이 무렵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 시민단체처럼 많은 상근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전문가들과 결합해 있는 것도 아니다.
카페와 게시판에 모여든 자발적 행위자들이 의견을 내고 모으며 행동을 조직한다. 지속적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단속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들이 모으는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며 무조건적 지지자 그룹으로 존재하는 양상 등 부정적 모습도 보이지만 무엇보다 자발성에 기초한 움직임이라는 점이 과거 '동원'되던 소극적 시민에서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의제를 만들고 확산하며 항의를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해내는 과정은 기존의 시민단체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일상적 시기에는 이들은 번세바(번역으로 세상바꾸기 : 시민행동의 번역자원활동가 모임), 아네모네(아파트가격내리기시민모임) 등 여러 다양한 써클적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블로그나 게시판을 통해 개인의 운동이라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의 운동을 펼쳐가고 있다. 그들이 내거는 의제나 운동방식은 이미 가치의 측면에서 그리고 운동방식의 측면에서 기존의 시민단체를 뒤로 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처럼 시민사회가 개인의 결단과 선택이 사회적 의제로 형성되는 경험을 갖기 시작한 것에 보듯이 어쩌면 기존 시민단체가 90년대식 운동을 고집하고 있을 때는 더 이상 미래의 운동 주력군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터넷 시대 시민운동가는 창조적 자유인?
이같은 변화 앞에서 시민운동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지금 시민운동가들은 어느 새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파워엘리트로 성장하였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 사이에 시민단체들은 사람 구하기 어렵다고 하소연이다. 뉴스로 장식될 만큼 주요 시민단체에 들어가기 위해 이력서가 넘치던 호시절이 가고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있고, 구직사이트에 올려놓거나 광고를 낼 경우 일반 직장으로 생각하고 오는 사람 외에 시민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찾아오는 사람은 이제 드문 일이라는 하소연이다(유력한 단체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는 것 같긴 하다).
막강한 파워엘리트로 성장했으면서도 시민운동가는 여전히 매력없는 직업이기도 한 것이다. 대중강연에서 부딪히는 주된 질문이 당신은 언제 정치권에 가느냐이다. 시민운동가의 정체성이 어느 새 정치권에 가기 위한 중간정류장처럼 인식되어 있다. 지난 몇 년간 선거를 거칠 때마다 시민운동의 정파적 이미지는 강화되어 왔으며 시민운동의 독립적 정체성은 상처를 입었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논란은 시민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가치로 답해야 한다는 상식적 결론에 다다르고 있으며 시민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가치로 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와 그에 따른 전망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과거와 달리 이 논의과정이란 이견 없는 합의를 목표로 하게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견 없는 합의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려야만 시민운동 내에서 그간 닫혀 있었다고 생각되는 이같은 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기존 시민단체들은 마치 이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여전히 부분운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새로운 전망을 찾아가는 논의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의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기존 시민단체들도 부분적으로 함께 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추동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망의 부재를 호소하는 운동가가 주변에 늘어나는 것이 그 반증 아니겠는가? 기존 시민단체들이 가져야 할 그 '전망'이란 결국 공동체가 가져야 할 가치지향과 그를 실현할 사회적 의제와 운동방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관성에 매여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지나간 과제의 뒤치다꺼리에 몰려다니는 것이 운동의 주된 과제처럼 되어서는 '전망'을 창조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인의 모습을 지닌 운동가. 거창한가? 우리를 옭아맨 낡은 방식의 사고와 관행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한다. 창조적 자유인으로서의 운동가는 그런 점에서 거창하지 않다. 소박한 실천이다. 우리가 90년대 운동의 전형에 맞는 운동가로 관성적으로 훈련되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있고, 반면에 기존 시민단체에 속하지 않은 곳에서 훈련되고 있는, 전과 다른 모습의 운동가들이 출현하고 있다.
어느 단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또 여러 단체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각의 단체들에게는 이들은 자원활동가지만 그들이 관계맺는 의제의 영역과 그 영역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다른 의미의 활동가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활동한다. 인터넷 상의 수많은 카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전과 다른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기존 시민단체 인사들처럼 유명하지도 않지만 이들이 던지는 문제의식과 활동방식은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려는 진정성이 바탕에 있기에 신뢰를 더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존 시민단체들이 90년대를 통해 시민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하게 확대한 공간에서 시민운동은 대중적으로 성장하였다. 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스스로 담론을 만들고 네트웍하여 거리로 나서고 있다. 기존 시민단체들이 이를 운동의 변화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동원할 부대' 혹은 '동원해야 하나 동원되지 않는 부대'로 인식하는 경향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이들은 스스로 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 시민운동이 그동안의 성과에 만족해 제자리에 머문다면 어느 새 우리는 90년대라는 낡은 시대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삼보일배...시민운동이 주목해야할 성찰의 키워드
이미 앞에서 말한 셈이지만 이제 진지하게 새로운 여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과제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가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적 의제에 대한 탐구와 도전,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가져온 사회의 변화는 과거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생태, 인권, 성, 빈곤, 노동, 평화 등의 문제는 일국적 범주에서뿐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문제라는 관점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이제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분단으로 인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과거와는 또 다른 지형에서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긴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다가와 있다.
90년대의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의 투명성과 형평성, 공정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고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사회적 룰을 만드는 일에 기여해 왔다면 이제 시민운동에는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새로운 사회변화에 조응하는 의제들을 제기하고 공동체의 가치지향을 만들어 나가며 새로운 사회적 룰과 문화로 만들어가는 숙제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는 기존의 우리 사회가 갖는 질서와 문화 전체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로 시작될 것이다.
둘째는 운동방식과 운동가의 전망, 전형에 대한 변화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존 시민단체의 운동방식과 다른 운동양식, 그에 따른 전혀 다른 운동가의 모습 등이 보이고 있다. 90년대 식의 시민운동의 전형은 전문적 정책대안을 내기 위한 공청회, 토론회, 이를 사회적 압력으로 조직하기 위한 집회와 시위, 캠페인, 성명서, 각종 기획된 보도자료, 입법청원 등이다. 당연히 이같은 운동방식에서는 전문가와 상근운동가의 결합이 중요한 요소로 된다.
앞으로도 그러할까? 정책과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전문가중심의 싱크탱크들이 훨씬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전문가들의 견해가 사회적으로 의제화되는 방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그 저변을 확대해준 것은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방식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문가들도 굳이 시민단체를 매개로 자신들의 견해를 사회적으로 의제화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각종 공간이 열려 있으며 자신들만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라 하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일상화된 캠페인, 퍼포먼스, 성명서, 공청회 등에 사람도 오지 않고 언론에 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론을 조직하는 방식의 중심이 인터넷으로 옮겨가면서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진 것이다.
80년대 대중운동이 노동조합과 농민단체들을 매개로 집단의 위력과 군중동원이라는 전술을 택해 왔고, 90년대 시민운동이 수십 개, 수백 개씩의 단체 연명으로 단체를 동원하는 전술로 대중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두 양식이 그간 공존해왔다면 이같은 동원전략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네트웍적 방식이란 결국 수많은 개인과 써클, 구체적 의제에 동의하는 개인과 써클의 자발적 참여라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아마도 운동방식은 이렇게 변화할 것이며 이는 운동가 개인의 존재방식도 바꾸어놓게 될 것이다.
특별히 조직과 집단에 종속적 지위를 갖지 않는, 한 조직에 풀타임 근무를 하면서도 다른 여러 조직과 서클에 관여하고 일하는 모습을 아마도 흔히 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어느 조직에도 풀타임 근무를 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단체에서 적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도 보게 될 것이다.
규모가 작은 단체들은 이미 이같은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규율이라는 이름아래 특정한 단체의 엄밀한 정체성으로 개인을 가두어 두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의적으로 일하며 어디에 속하든 관계없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우선인 자유인들의 모습으로 운동가는 거듭날 것이다.
셋째, 앞으로 시민운동에게 중요한 요소, 키워드는 인터넷, 지역, 개인이다. 인터넷과 개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지역이란 키워드는 ‘생활’운동이란 방향과 결합하면서 시민운동이 지역의 주민과 구체적으로 결합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지금의 지역운동이 지역내 기득권세력과의 싸움을 통해 지역의 시민사회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과정에 있다면 향후에는 이 공간에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실현하는 운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될 것이고 이 과정은 시민들이 정치와 행정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인터넷이라는 수단은 지역운동을 거주민 중심과 지역적 경계 안에 가두어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보길도 문제나 천성산 문제는 지역의 문제이지만 거주민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개된 운동이기도 하였다. 이는 지역운동이 지역이라는 지리적 경계 안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울의 단체들이 지역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민운동의 향후 방향과 관련해 하나의 키워드를 더 든다면 민중운동과의 ‘연대’일 것이다. 노동조합 등 기층조직 역시 여전히 중요한 사회발전의 동력이겠지만 시민운동과 만나는 모듈은 과거와 갖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80년대 민중적 대의라는 깃발아래 발걸음 맞추어 나간다 식의 연대가 아니라 파병반대에 대한 공동행동처럼 우리 사회가 새로이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한 합의에 기초한 사안별 연대라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아직 논의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인식이 확장되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연대의 방향은 기존 민중운동과 기존 시민운동의 분립적 연대가 아니라 두 진영의 결합 자체가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식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두 진영 모두 이 점에서는 현재는 준비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안별 연대라는 방식에 당분간은 의존하게 될 것이다.
운동의 방식에 있어서도 기층조직의 물리적 동원력에 기초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방식을 배제하지 않지만 시민운동이 그간 취해 온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개인과 서클, 지역이라는 조직들을 연결해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성찰적 이해가 있는 협력적 시민 개인과 그룹의 연합이라는 방식을 자신의 것으로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모두를 담지는 못하였다. 우리 사회에, 우리 운동에 스스로 던지는 질문의 내용과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삼보일배는 그 질문의 방식과 문제제기의 방식을 기존의 운동과는 전혀 다르게 보여주었다. 여기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담겨있다. 어려운 내적 성찰을 담은 운동은 진정성이 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전개하진 못했지만 지금 우리가 우리를 성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