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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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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블루와 레드, 길에서 만난 두 개의 미국

미시간 주 플린트(Flint)는 세계 최대의 기업이었던 제너럴 모터스(GM)의 본거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이클 무어의 '고향'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화씨 9/11>을 보면 무어는 자신의 고향 플린트에서 해병대원들이 신병을 모집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가난한 흑인 청소년들만 주로 '꼬임'에 넘어간다. 이라크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애간장 끊는 사연도 플린트 발이다.

반면 무어의 첫 영화 <로저와 나(Roger and Me)>는 전적으로 플린트에 관한 것이다. 1986년 11월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 로저 스미스가 3만 명이 일하는 플린트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는 것을 계기로 플린트가 겪고 있는 실직과 빈곤의 아픔을 그린 영화다. 제목이 그렇게 붙은 것은 영화 전편에 걸쳐 로저 스미스 회장이 플린트 시내의 참담한 실정을 보게 하도록 무어가 스미스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과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DVD로 빌려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 영화는 플린트에서는 상영되지 않았다"는 자막이 나온다. 이 문구에 잠재된 메시지는 플린트에서는 이 영화를 보이코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플린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는데 불만을 품은 플린트의 상인들이 그렇게 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봤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격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플린트 도심에 있는 미시간대 플린트 캠퍼스의 사회복지학과 캐슬린 워얼(Kathleen L. Woehrle) 교수의 연구실. 워얼과 찰스 베일리(Charles W. Bailey) 등 두 명의 교수와 얘기를 나누던 중 가볍게 그 부분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베일리 교수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베일리 교수는 이곳에서 30년 이상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무어를 본 기억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쓱해진 필자가 말을 더듬거리며 "그럼 영화가 상영됐느냐"고 물었더니 워얼 교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술적으로 플린트 시내에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이제는 한 군데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 경계를 조금 벗어나면 극장이 여러 군데 있긴 한데 거기서 <로저와 나>를 상영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마이클 무어와 플린트

찰스 베일리 미시간대 교수
찰스 베일리 미시간대 교수 ⓒ 홍은택
플린트 내에 극장이 없으니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 그걸 마치 극장이 있는데도 상영이 안 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관객을 오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구 12만 명이 사는 도시에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 자체도 GM이 빠져나가고 난 뒤 도시가 겪는 아픔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 한 여인이 토끼를 키워서 식용으로 파는 장면에 충격을 받는다. 그 여인이 직접 토끼를 죽여서 껍질을 벗기는 장면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 두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완 동물을 고기로 먹어야 할 만큼 플린트가 몰락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무어가 극단적 사례를 일반적인 현상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무어는 엄격히 말해 플린트 출신이 아니다. 그는 플린트 남동쪽에 있는 데이비슨(Davison) 출신이다. 그는 데이비슨 시의 역사상 최연소 교육위원과 최연소 전임 교육위원의 기록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18세에 교육위원에 당선돼 22세에 연임에 실패했다. 그의 업적은 고등학교마다 흡연구역을 설치한 것. 화장실에서 피우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니까 아예 건물 바깥에 합법적인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에서 피우라는 뜻에서였다.

나중에 다른 도시에서 만난 미 환경보호청(EPA)의 공무원 매트 페인은 무어가 교육위원이던 시절 데이비슨에서 고교를 다녔다면서 "우리는 흡연구역을 '흡연 부두(smoking dock)', 거기에 들락거리는 아이들을 '부두의 쥐새끼들(dock rats)'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이는 무어다운 독특한 발상이었지만 재선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만다.

무어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GM에 다녔다. GM과 플린트가 동의어와 마찬가지였으니까 무어가 플린트 출신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한데 굳이 그를 플린트 출신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플린트의 마지막 남은 존엄마저 무어가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베일리 교수는 말했다.

플린트는 헨리 포드가 처음으로 자동차 대량 생산시대를 연 디트로이트에서 불과 109km 북쪽에 있다.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가 듀런트-도트(Durant-Dort) 마차 공장을 접고 1908년 당시로서는 신기술인 자동차 공장을 과감히 세우면서 플린트는 비약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GM이 포드를 추월해 세계 최대의 자동차 기업이 되면서 플린트는 디트로이트를 제치고 자동차의 메카가 되기도 했다.

"플린트는 약속의 땅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한 때 인구가 20만 명이 넘었다."

베일리 교수는 시내 곳곳을 차로 안내하면서 플린트에 대해 설명했다. 그 역시 약속의 땅을 찾아온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 남부에 살았다. 어느 날 부친이 사냥 갔다가 총기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살 수 없어 삼촌이 있는 이 곳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베트남 전에서 다리를 다쳐 학업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약속의 땅 플린트의 몰락

제너럴 모터스의 대표적 차종 뷰익의 전 세계 본사. 텅 비어있다.
제너럴 모터스의 대표적 차종 뷰익의 전 세계 본사. 텅 비어있다. ⓒ 홍은택
산업공동화 또는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라고 하면 감쪽같이 산업이 빠져나가는 게 연상되지만 그 산업을 품어왔던 도시에 깊고 오랜 흉터를 남긴다. 산업화가 도시의 환경을 파괴한다고 하면 탈산업화는 도시의 생명을 파괴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작기계와 건물들이 무성한 잡초 속에서 나뒹구는 모습은 공동묘지가 떠오르게 한다. 근대화의 공동묘지.

플린트 시내에는 뷰익 시티(Buick City)라고 불리는 넒은 구역이 있다. GM을 대표하던 차종인 뷰익의 세계 본사와 조립공장이 있던 곳이다. 세계 본사는 2층 밖에 안되지만 건물의 한쪽 변이 도로의 한 블록을 차지할 만큼 넓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여전히 단정했다. 수천 개의 사무실이 있을 법한 그 건물이 통째로 비어있다. 이런 곳에서 술래잡기를 한다면 절대 술래가 돼서는 안 된다.

뷰익 조립공장은 물론 더 크다. 주차장의 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아스팔트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질긴 잡초들이 뚫고 나와 아스팔트를 파란 풀로 뒤덮는 자연의 도배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물 주변에 세워진 몇 대를 제외하고는 차가 없다. 거대한 허공이다. 인생이 아니라 공장의 덧없음이다.

"어마어마한 공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게 바뀌기는 하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인가."

베일리 교수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는 종종 이곳에 오면서도 항상 감회에 젖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저 외면하지만 나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이곳에 오곤 한다."

플린트 시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고, 어떻게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행복한 도시(the happiest city)'로도 뽑혔다고 한다. 영화 <로저와 나>에 삽입된 도시의 퍼레이드와 축제의 기록 필름을 보면 그 들뜨고 행복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노동자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다. 노사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묘하게도 미국 노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승리로 기록되는 1937년 파업의 결과였다. 우리는 바로 그 역사적 현장으로 가고 있다.

노동자 중산층 시대를 연 파업

뷰익 조립공장의 주차장 터.
뷰익 조립공장의 주차장 터. ⓒ 홍은택
베일리 교수는 시보레(Chevrolet) 엔진 공장으로 안내했다. 사우스 시보레 에버뉴(South Chevrolet Avenue)의 공장 서벽에 ‘The FlINT SIT-DOWN PLANT NO.4(플린트 연좌농성 공장 제 4호)’라는 미시간 주 사적 표지판이 붙어있다. 여기가 바로 1936년 말부터 시작된 GM과 자동차노조연맹(United Auto Workers Union, UAW)의 힘겨루기가 절정을 이룬 곳이다. UAW는 대공황 이후 악화된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미국 노동총연맹)과 독립해서 설립된 조합이다.

GM이 UAW를 인정하지 않자 UAW 소속 노조원들은 36년말 애틀란타에 있는 피셔 보디 공장(Fisher Body Plant)에서부터 시작한 파업을 캔자스 시티를 거쳐 플린트에 있는 피셔 보디 제1호 공장으로 확대했다. 노조원들은 노조가 없거나 조합의 힘이 약한 다른 공장으로 일감이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에 진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공장에 진입하려는 경찰, 무엇보다 회사의 경비원, 스파이들과 무력 충돌이 있었지만 공장을 빼앗기지 않았다. 물론 당시는 노동자에 우호적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민주당 정권의 시절이었다.

노조원들이 동조 시위를 요청하자 디트로이트 시내 캐딜락 광장에 15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뜨거운 호응에 힘입은 노조원들은 37년 2월1일 시보레 엔진 공장인 제4호 공장, 바로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이 공장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4호 공장이 점거되면 엔진 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시보레 공장들이 멈춰야 한다. 표지판에 따르면 노조원들은 성동격서의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으로 돼 있다. 인근 제9호 공장에서 연좌 농성을 벌여 구사대원들을 그 쪽으로 유도하고 노조의 여성 기동타격대(Women’s Emergency Brigade)가 외곽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가운데 4호 공장을 장악했다. 공장을 되찾으려는 사측의 최루탄 세례에 볼트, 너트 투척으로 맞서는 불퇴전의 공방전 끝에 열흘 만인 2월11일 GM이 UAW를 단체교섭의 상대로 인정함으로써 48일간의 연좌 농성 파업은 막을 내렸다.

이후 UAW와 GM의 단체협상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도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노동자 중산층 시대가 미국에서 열렸다. 자동차 회사들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차를 팔게 됐다. 73년 오일 쇼크가 첫 충격이었다. 큰 차를 만들어내던 미국 회사들은 일제 소형차에 밀려 거의 부도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80년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싼 임금을 찾아 멕시코로, 노조가 약한 미국 남부로 앞다퉈 공장을 옮겼다.

플린트 공장 노동자들에게 18달러를 줬던 시간당 임금이 멕시코에서는 80센트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UAW의 비타협적인 고임금 고수 전략이 공장이전과 실직을 불러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베일리 교수는 전했다.

공장 엑서더스는 그 막강한 제4호 공장도 막을 수 없었다. 기계가 멈췄다. 공장 안에는 정적이 감돈다. 이 육중한 엔진 공장들이 그냥 햇볕을 받으며 고철과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벽에는 미국 노동운동의 찬란한 훈장을 달고서. 플린트의 GM에서는 8만 명이 일했다. GM이 공장을 이전하면서 노동자들은 따라가거나 퇴직 수당을 받고 전직했다.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코언(David Cohen)의 저서 ‘CHASING THE RED, WHITE, AND BLUE’에 따르면 연간 4만 달러에서 6만 달러를 받던 플린트 내 5만 개의 일자리가 연간 8천 달러에서 1만2천 달러를 받는 저임금 서비스직으로 바뀌었다.

수입의 격감은 인종 분포의 역전을 가져왔다. 8대2였던 백인 대 흑인의 비율은 지금은 흑인이 6대4의 비율로 더 많다. 백인들이 빠져나가니 흑인의 인구 비율이 늘어난 탓. 자연스럽게 미국 사회가 제도적으로 그토록 막으려고 노력했던 인종 분리(segregation)가 일어났다. 교외의 백인과 도심의 흑인. 그걸 도너츠 현상이라고 부른다.

대량해고에서도 흑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 연재 첫 회에서 미국은 선착순 사회라고 썼지만 이 원칙은 상황이 안 좋아질 때는 후착순으로 바뀐다. 집단해고의 원칙은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가장 먼저 잘린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연공서열을 존중하는 것인데 흑인들의 피해가 컸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잘 살던 플린트였지만 지금은 어린이의 40%가 절대적 빈곤층에 속한다고 베일리 교수는 말했다. 워얼 교수는 초등학교 4곳에는 거의 학생 전원이 무료급식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공장의 이전은 '대학교육을 안 받고도 중산층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것.

무위로 돌아간 플린트의 안간힘

오토 월드를 부수고 새로 지은 대학건물과 베일리 교수
오토 월드를 부수고 새로 지은 대학건물과 베일리 교수 ⓒ 홍은택
플린트 시가 몰락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를 되찾겠다는 집념이 눈물겹다.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80년대 400객실 짜리 초호화 하얏트 리젠시 호텔을 1400만 달러를 들여 도심에 지었다. 호텔 맞은 편에 쇼핑몰과 놀이공간이 함께 있는 워터 스트리트 전시관을 세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린트 강변에 1억 달러짜리의 오토월드 실내놀이공원(Autoworld)을 조성했다. 모두 2억 달러가 소요됐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도시의 추락은 멈추지 않았다. 전시관은 6개월 만에, 놀이 공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전시관은 미시간 대학이 헐값인 6만 달러에 사서 지금도 식당과 사무실로 쓰이고 있지만 오토월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토월드가 있던 자리에는 역시 대학 건물이 들어섰다. 16층짜리 매머드 호텔인 하얏트는 라디슨에 인수됐다가 리버프론트를 거쳐 지금은 캐릭터 인으로 바뀌었다.

베일리 교수는 "시가 투숙률 50%를 보장해주기로 하고 호텔을 팔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혈세가 이 호텔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예컨대 손님들이 객실의 30% 밖에 차지 않으면 나머지 20%는 비어 있어도 시에서 돈을 내줘야 한다. 그러니 시 자체도 버티기 어렵다. 시 재정도 파탄이 나 주 정부가 시의 재정을 2년간 대신 운영했다.

흑인들이 밀집된 곳은 도시의 북쪽이다. 여기서는 그 지역을 가리켜 '북쪽 끝(North End)'이라고 부른다. 차로 플린트 구석구석을 돌다가 플린트에서 가장 가난하고 범죄가 많은 노스 엔드로 향했다. 마이클 무어는 지난해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으로 아카데미 영화상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바로 2000년 2월 이 북쪽 끝에 있는 테오 뷰얼(Theo Buell)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살인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여섯살 같은 반 친구에게 총으로 살해당한 케일러 롤랜드
여섯살 같은 반 친구에게 총으로 살해당한 케일러 롤랜드 ⓒ 자료사진
911 응급 전화가 걸려온다.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총에 맞았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있다. 어쩔 줄 몰라 울부짖는 초등학교 교사의 전화 음성이 계속된다. 어디서 총을 맞았느냐. 교실이다. 범인은 어디에 있느냐. 교무실에 있다. 1학년이었던 케일러 롤랜드(Kayla Rolland)를 죽인 범인은 같은 반의 여섯 살짜리 남자 아이. 기록을 좋아하는 미국의 기준에서 보면 사상 최연소 총기 살인사건이다. 그는 삼촌 집의 신발장에서 32구경 데이비스 인더스트리스라는 총을 집어와 쐈다. 40달러와 함께 마리화나 한 봉지를 주고 이 총을 구입한 삼촌도 함께 구속됐다.

CBS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아더 부시(Arthur Busch) 검사는 "이 아이가 자란 환경보다 더 나쁜 환경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아이의 아버지 데이비드 오웬은 마약과 강도사건으로 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고,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일주일 전 집세를 못내 철거 명령을 받고 아이를 삼촌 집에 보낸 뒤 다른 곳에서 살던 중이었다. 아이는 태어난 뒤 줄곧 마약과 총기 범죄로 득실대는 집과 주변환경에서 자라났다. 그곳이 바로 북쪽 끝, 노스 엔드다.

그러나 베일리 교수가 필자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북쪽 끝은 그런 곳이 아니다. 우리는 그 북쪽 끝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에버뉴로 올라와 듀퐁 스트리트로 내려갔다. 이곳의 특징은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있다는 점이다. 웃음 소리도 크고 움직임은 느릿느릿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백인들도 한 둘 보인다. 때로는 낯설다는 것 때문에 불필요한 공포를 품을 때가 있다. 유리 대신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들, 말없이 쓰러져가는 가옥들, 뜻 모를 낙서들, 그리고 옆을 보면 유달리 엔진 소음이 큰 흑인 차. 밤에는 하얀 치아만 보이는 검은 그들. 뉴욕의 할렘과 워싱턴의 사우스웨스트, 로스엔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시카고의 남부에서도 느낄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그가 말했다.

"나도 여기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살 때 벗어나고 싶었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못 살 데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은 어디든 살아가게 돼 있다. 마치 천형을 받은 것처럼 플린트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라고 못박지는 말아달라."

그의 부탁은 낮은 절규처럼 들렸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산업화시대의 유망주였다가 탈산업화시대의 지진아로 전락한 플린트. 그곳에도 생명이 숨쉬고 꿈이 자란다.

(다음에는 디트로이트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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