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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순택
아스팔트 도로 위에 빠른 오토바이인지 탱크인지가 지나가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도로 위에 우뚝 서있다. 그런데 그 여학생에겐 목이 없다. 목 위의 얼굴 사진을 손으로 받쳐들고 있을 뿐이다.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횡포를 보여준 효순이·미선이 추모 촛불시위에서 봤을 법한 사진인데 뭔가 많이 어색하고 아이러니 하다.

“아이야, 너의 머리는 어디에?”,“내 머리는 으깨어졌다오. 뇌수가 길바닥을 흥건히 적셨다오",“쯧쯧... 누가 너희들을...”,“주한미군이... 그리고... 당신이...”,“나?”.... 아이들은 열 네 살이었다. 그리고, 열 네 살일 예정이다." (2002. 10. 서울 종로 / Pigment Print)

효순이, 미선이와 ‘나’가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듯한 이 사진의 설명은 보는 이의 발길을 붙잡고, 가슴에 혼란한 무엇인가를 던져준다.

노순택씨는 이 사진에 대해 “미국의 잘못된 만행에 대해 여러 방법으로 항의는 하고 있지만, 사건을 금방 잊어버리거나 때로는 침묵했던 우리의 잘못도 있는 것”이라며 “제2, 제3의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미국의 책임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 정현미
종로구 인사동 골목 안의 김영섭사진화랑 유진홀에서 열리고 있는‘분단의 향기(노순택 개인전)’에는 ‘어색함’이 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보는 이들을 혼란 속에 던져 놓는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그 혼란 속에서 ‘내 생각’이 뭔지를 찾기 위해 ‘생각’하게 된다.

‘분단의 향기’는 작가의 강한 주관적 표현을 수용만 하는 사진전이 아니다. 작가의 주관에 대해 은근히 동감을 강요당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사진전도 아니다. ‘분단의 향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이러니 속에서 진짜 내 생각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는 점에서 여느 전시회와는 다르다.

ⓒ 노순택
이북 어린이들이 손을 흔드는 사진의 설명에는 “아이들아, 너희들은 왜 귀엽지? 그 위장된 가면을 벗고 악마의 모습을 보여 봐.” 북녘의 어린 악마들.... 가증스런 눈물을 흘리며 “통일 조국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소리치다. 2001. 8. 북한 평양 순안공항 / Pigment Print)

기자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왜 작가가 북한 어린이를 ‘악마’라고 칭했는지 궁금해했다. 노씨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반공시각으로 북한의 아이들을 보면 ‘악마’로 보여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노씨는 “순수하게 보면 마냥 귀여울 수 있는 아이들이 북한의 이데올로기가 주입돼 해방시켜줘야 할 존재로 보여지는 것은 이미 제도화된 시각으로 색깔을 씌워 바라보기 때문”이라며 “어떤 사람에게는 ‘귀여운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더 거부감을 느낄 수 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씨는 북한을 제대로 보고 있건, 그 반대로 보고 있건, 분단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건 전시회를 보면서 스스로의 혼란을 통해 고민해보길 바라고 있었다. 노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편향된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을 수용하고 인정해 대화할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 노순택
뉴욕 한 복판에서 테러가 벌어졌는데 한국에서 시체놀이가 행해진다. (혹시 못 말리는 짱구의 친구들?) 이는 ‘워싱턴에서 재채기만 해도 서울은 감기몸살에 걸린다’는 진한 농담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진 것일까? (2003. 8. 서울 양재동, 한국 전력에 대한 테러대비 훈련 / Pigment Print)

‘분단의 향기’ 사진 전시회의 홍보 포스터로도 활용되어 시선을 끈 이 사진은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한국에서 테러대비훈련을 실시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한국의 테러대비 훈련을 ‘시체놀이’라며 냉소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을 통해 미국에 종속적인 한국을 비판하고 있다.

노씨는 “미국이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독 한국이 그 영향을 심하게 받는 것은 한국사회의 분단 상황과 미국에 의존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며 한반도 위기를 방관한 채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 정부의 권력자는 반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노순택
전시회장에는 이외에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한국 탱크를 자랑삼아 선보이며 축제분위기에 술렁이는 작품, 평화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기념하는 곳에서 어린 꼬마들에게 전쟁을 가르치는 작품, 미국에서는 한국의 분단 상황이 ‘기념’과 ‘감시’의 대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카메라를 든 미군의 작품 등 등 모두 36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 노순택
노씨는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첨예한 모순의 한 가운데엔 ‘분단’과 ‘미국’이라는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며 “이 괴물들의 향기는 시인 김남주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분단이 ‘향기’로 느껴지든 ‘악취’로 느껴지든 수용할 자세로 ‘열려있는 사진전 ‘분단의 향기’는 지난 18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종로구 인사동에서 계속된다. 또한 오는 26일 오후 6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 정현미
노순택씨는 2001년 포토저널리즘 페스티벌에서 ‘매향리 주민의 미공군폭격장 폐쇄투쟁에 대한 보고서’와 2003년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 - 사진가 10인의 눈', 2004년 '리얼링 15년' 전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왜 반미가 문제인가'(공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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