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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참동안 생각하고, 되돌아봐도 지금의 심리적 어려움을 - 흔히 얘기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오는 이메일부터 직장 상사의 채근과 그에 대한 변명과 구실들. 매달 매분기에 시달리는 매출에 대한 압박으로 살아온 지 15년이 넘은 지금. 유난히 어제와 오늘은 그런 압박이 짜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고민을 한다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는 요즘, 매달 꼬박꼬박 은행 계좌로 들어오는 급여가 있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있을 때 과연 어디로 가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는지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아침부터 늑장을 부려 10분 정도 늦게 출근해 지각까지 하고도, 컴퓨터 모니터마저 보기 싫어 신문을 뒤적이다가 서울대 야구부 기사를 봤습니다.

그 기사를 본 순간 서울대 앞에 있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서점이 생각나더군요. '그래, 오후에 서점에 한 번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서울대 야구부의 첫승과 서점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곳에 가면 새로운 걸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점심까지 혼자 몰래 먹고, 사무실을 나와 먼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목덜미에 시원한 가을 바람이 들어오는 거 같기도 하고, 그냥 왠지 마음에 여유로움까지 생기는 거 같더군요. 오늘따라 유난히 전철도 시간 맞춰 잘 오는 거 같았습니다. 바빠 보이고 지쳐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를 잡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 보며 서점을 향해 갔습니다.

9월이라 개강을 한 거 같아 요즘 학생들의 모습도 보려 했지만, 서점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서점 안에서 제일 먼저 눈이 간 곳은 입구에 있는 계산대였습니다. 제 기억에 당시 사회과학 서점의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계산하기 전 비닐로 책표지를 해주는 거였거든요.

여전히 차곡차곡 알맞게 잘려져 있는 비닐뭉치는 맨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더군요. 왠지 그 광경이 흐뭇하고 좋아 핸드폰까지 끄고 천천히 책을 둘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왠걸, 제 눈에 익숙한 제목의 책이 하나도 없더군요. 모두 지금 내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어려운 제목들만 눈에 들어오더니 그냥 내가 책 속에 꽉 갇혀 있다는 느낌만 들었습니다. 그렇게 책 사이로 우물쭈물 하던 그때 열심히 아르바이트 학생과 얘기를 나누던 서점 아저씨에게 구원을 요청해야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 요즘 볼만한 깊이도 있지만, 저 같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책 좀 추천 해 주시죠?"
"그러세요? 어떤 종류의 책을 원하시는지?"
"그냥 깊이 있고 쉬운 책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부끄러움이 제 가슴을 쓸어 내리더군요. 깊이 있고 쉬운 책이라니….

"그러세요? 이 책 어떠세요"하며 '우리 역사 최전선'이라는 책을 보여 권해 주었습니다.
"서로가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현대사에서 쟁점이 되는 얘기들을 서로 논쟁하며, 또한 보완도 하며 사적인 논쟁에서 공적인 논쟁으로까지 된 내용을 모은 건데, 아마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순간 전 이메일이라는 한 마디에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그래 이 거다. 그래도 나와 조금은 친숙한 단어로 추천해주시는 책을 한 번 보자' 그리고는 순간 아내가 이전부터 소장하고 싶어했던 ' 해방전후사의 인식 1'이 생각나 개정판을 한 권 더 사서 나오게 되었죠.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역사책 두 권이 제 손에 쥐어지게 된 거죠.

얼마전에 집 앞에 있는 동네 서점에서 주인아저씨께 책을 추천해 달랬더니, 슬며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여 주었는데 그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학교 앞 서점주인아저씨는 쉽게 '아저씨!'라 못 부르고, 그냥 '형!'이라고 불렀던 당시 기억도 되살아나며 시원한
관악산 줄기의 가을 바람을 맞으며 책 두 권을 옆에 끼고 서점을 나왔습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전철 역에 내리니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든 레코드 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에 들어간 저는 망설임 없이 주인 아주머니에게 좋은 노래 추천을 부탁했습니다.

마침 그 아주머니도 저와 동년배인듯 웃으시며 김현식 헌정 앨범을 꺼내어 보여 주시던군요. "아저씨 연배에 듣기 좋은 노래 일 겁니다"하며 천천히 포장을 해주셨습니다.

이번엔 순간 작은 놀라움이 내 얼굴에 번졌습니다. '아! 이 아주머니가 어떻게 아셨을까? 내가 김현식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걸.' 조그만 비닐 주머니에 책과 음반을 넣고, 기분 좋게 회사로 돌아온 나는 퇴근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임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전축이 있는 내 방에 가서 빨리 책도 보고 노래도 감상해야지 하는 즐거운 조바심과 설레임이 다시금 제게 다가온 오후 늦은 사무실에서의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한다는 게 별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드시 자우림의 '일탈'의 노랫말처럼 번지점프를 하거나, 스트립쇼를 하거나,
혼자 훌쩍 떠나버릴 용기는 없지만 이렇게 소시민적인 일탈도 오늘 하루 제게는 아주 큰 즐거움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냥, 평소와 약간 다른 복장으로, 현대인의 필수품이라는 핸드폰마저 꺼버리고, 마치 젊은 날의 나처럼 서점과 레코드 가게를 두어 시간 다니는 것도 이렇게 내게 잠시의 휴식을 주는구나 싶더군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밀린 일은 또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하루의 일탈을 그냥 즐겼던 겁니다. 어쩌면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 모든 이에게 미안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오늘 밤 그 책을 뒤적이며 그 노래를 듣고 있는 그 순간 내게는 작은 쾌재를 아이처럼 부를 수 있는 잠시의 일탈을 앞으로 한번 더 준비하려고 합니다. 만일 다시금 오늘 같은 하루를 더 즐기며 보낸다면 난 이렇게 변명을 할까 합니다.

'오늘 하루 잠시의 일탈이 나로 하여금 또 글과 노래를 사게 만든다면 허약한 나의 지적 버팀목이 조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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