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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규 <모든 책은 헌 책이다>
최종규 <모든 책은 헌 책이다> ⓒ 그물코
<십자가의 꿈>(박몽구 지음, 풀빛, 1986)이라는 시 모음도 구경합니다. 지난날 이 분이 지은 다른 시 모음을 읽은 적 있습니다. 그때 퍽 괜찮다고 느껴서 <십자가의 꿈>도 고릅니다. 책장을 넘깁니다. 짤막하게 남아 있는 흔적, 그러니까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은 분 흔적을 만납니다.

-금서 해금일에
1987. 10. 20
이근후

다른 말은 더 없습니다. 딱 한 마디입니다. '금서 해금일에'라는 말 하나. 이 글귀 하나를 본 가슴은 뭉클합니다. '금서가 풀리던 날? 아, 그런가 보구나. 금서가 풀리며 여러 가지 책들을 책방에 진열할 수 있었고 '풀빛판화시선도 그때 많이 풀렸나 보구나'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저는 1987년에 국민학교 6학년이어서 그때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살던 인천에서도 동인천과 주안과 부평에서 엄청난 시위대가 몰려다녔고,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를 지나가며 잔뜩 겁먹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122~3쪽, '신촌 숨어있는 책' 몇 토막


우리 말과 헌책방 지킴이 최종규. 나는 처음 그의 글을 읽었을 때 나이가 제법 느긋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십대 끝자락에서 육십대 끝자락 사이, 그러니까 책으로 말하자면 서점에 반듯하게 깔려있는 따끈따끈한 '새책'이 아닌 헌책방에서 오래 묵은 헌책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사실, 지난 3일 오후 1시께 서울시청 맞은 편 프레스센터에서 언뜻 그를 처음 바라보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날 내가 바라본 최종규는 무르팍을 대충 잘라낸 물 빠진 청바지 차림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것도 특별히 기른 게 아니라 수염이 자라는 그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헌책방 지킴이 최종규
헌책방 지킴이 최종규 ⓒ 함께살기
근데, 그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니. 세상에. 그 시퍼런 나이에 그 흔한 꼬부랑 글씨보다도 우리 말을 더 아끼고 사랑할 줄 알며, 반듯한 새책방보다는 낡고 먼지가 풀풀 이는 헌책방을 골고루 찾아다니고 있다니. 게다가 하마터면 잊혀지고 버려질 뻔했던 좋은 책까지 골라내는 눈까지 가지고 있음에랴.

"헌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헌책방 이야기를 잘 안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헌책방에 있는 헌책은 새책방과 달리 '딱 한 권'일 때가 잦아서 자기만 아는 헌책방 정보를 남에게 알려주면 자신이 애타게 찾던 책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제가 '숨어 있는', 아니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헌책방을 다리품 팔아서 알아내어 인터넷에 알리고, 길그림을 그려서 나누고, 헌책방 소식지를 만들어 알릴 때 싫어하신 분도 많았습니다."-'머리말' 몇 토막

최종규(29). 그는 지난 13년 동안 우리 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헌책방 이야기를 꼼꼼히 써 온 헌책방 지킴이이자 우리 말 지킴이다. 그런 그가 지난 5월에 펴낸 <모든 책은 헌 책이다>(그물코)는 늘상 새 것에만 길들여진 요즈음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지고 버려지는 헌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 책은 '즐겨찾기', '자주 묻는 헌책방 이야기', '헌책방 나들이', '헌책방에서 만난 사람들', '사라지는 책방을 기리며', '못다한 이야기'를 포함, 모두 여섯 꼭지에 32편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글쓴이가 헌책방에 자주 가는 이유에서부터 우리 나라 곳곳에 숨겨진 헌책방 전화 모음까지.

'함께살기' 최종규는 누구인가?
사라져가는 우리 말·헌책방 지킴이

"맨 위에 윗물인 새책방이 있다면 흘러흘러 맨 아래에는 아랫물인 헌책방이 있어요. 이곳에서 바다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책을 갈무리합니다. …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말라서 하늘로 올라가 다시 빗물로 내려오는 흐름고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책이 헌책방 헌책입니다." -23쪽, '헌책방 즐겨찾기' 몇 토막

우리 말과 헌책방 지킴이 운동을 하고 있는 최종규는 1995년부터 우리 말과 헌책방 운동을 하다가 1999년부터 책 만드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2003년부터 이오덕 선생님 유고와 원고를 갈무리하면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책, 헌책방, 우리 말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있다.

1998년에는 가장 어린 나이로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받았으며, 인터넷에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라는 모임을 꾸리고 있다. / 이종찬 기자
최종규가 처음 헌책방을 찾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다. 그는 그때 "절판된 독일어 문제 모음을 사러 헌책방에 처음" 갔다가 그 책을 싼 값에 사 읽은 뒤부터 헌책방에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나라 곳곳에 흩어진 헌책방을 꼼꼼히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생생한 이야기를 글로 적는다.

글쓴이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고작 열세해밖에 안 된 헌책방쟁이 발걸음이기에 전국 헌책방을 두루 담아내지 못했고, 이웃한 일본 헌책방 이야기"도 담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낮춘다. 이어 "우리 나라는 모든 것이 서울에 쏠려 있다 보니 헌책방도 지역 맛이 사라지며 한풀 꺾이고 말았기에 이번 책에서는 서울 헌책방 이야기 중심"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저는 말을 바르고 깨끗하게 써야 자기 생각과 삶도 바르고 깨끗하게 가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고, 이야기로 주고받는 말투 그대로 글"을 쓰고 있으며 "어설프고 잘못되며 식민지 찌꺼기와 서양 해바라기에 물든 낱말은 쓰고 싶지 않다"고. 이오덕 선생의 유고와 글을 갈무리하고 있는 우리말 지킴이답게 말이다.

신문 한뭉치를 만납니다. 헌책방에는 드문드문 낡은 신문 뭉치가 들어오는데 보통 열대여섯해나 스무해 앞선 때 것입니다. 때로는 소중한 역사 지료인 신문도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낡은 신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날 만난 신문 맨 위에는 <조선일보> 1980년 7월 5일치가 올려져 있군요. 궁금한 마음에 신문 뭉치를 집어서 들여다 봅니다. 1980년 <조선일보> 7월5일치에는 어떤 사건 하나가 대문짝 만하게 실렸습니다.

金大中(김대중) 內亂(내란)음모로 軍裁(군재)회부

-189~90쪽, '독립문 골목책방' 몇 토막


글쓴이는 독립문에 있는 골목책방에 갔다가 1980년 7월 5일치 <조선일보> 1면에 대문짝 만하게 난 기사를 읽는다. 조선일보 1면 머리에는 '김대중 내란음모로 군재회부'라는 제목을 큰 글씨로 뽑고 그 밑에는 작은 제목으로 '流血革命(유혈혁명), 政府(정부)전복-執權(집권) 기도, 추종자 36명도 함께 送致(송치) 방침'이라고 적혀 있다.

게다가 그 제목 밑에는 또다시 '반국가단체 한민통' 조직이라는 이름 아래 '북괴노선 지지-의장노릇 6년……조총련자금 거액 받아'라고 적혀 있으며, '국민연합 주축, 복학생 450명 포섭, 학원소요 폭력화' 라는 글과 '要職(요직) 미끼 12억 거둬, 전남대생에 5백만 등 뿌려'란 글까지 덧붙어 있다.

기사를 읽던 글쓴이는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기사가 참말이었을까요?"하고. 그리고 "그때 김대중씨에게 거짓 허물을 뒤집어씌운 정권 책임자나 언론사 사주와 기사를 쓴 기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런 거짓 허물을 뒤집어씌운 일을 두고 뉘우치거나 바로잡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때 문득 글쓴이는 헌책방에서 우연찮게 만나는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우리 삶과 역사와 사회를 비틀어 거짓이 참인 것처럼 꾸몄던 흔적을 찾아서 밝히고, 또한 알려야겠습니다"라며 스스로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시는 <조은책방> 아주머니는 처녀 때는 책이라면 '환장'을 했지만, 손님들이 책을 찾으면 좋아서 사 모았던 책도 하나하나 가져오게 되어 이젠 집에 책이 없답니다. 때로는 당신이 읽고 참 좋았던 책은 당신 헌책방을 찾는 책손에게 빌려주며 읽으라고 건네주기도 하는데,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일이 참 드물답니다.

그래도 좋았던 책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지 않아 알려주고 싶고, 그렇게 알려주면서 사서 보라고 해 봐야 읽는 사람이 없어서 빌려주곤 하는데, 빌려주면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군요. 그래서 이젠 '대장간에 칼이 없다더니 집에 책이 없어요' 하고 푸념을 늘어놓으십니다.

-268쪽, '왕십리 한양여고 조은책방' 몇 토막


최종규의 <모든 책은 헌 책이다>는 하루에도 수없이 버려지는 책의 하수구에서 진짜 '새책'을 건지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에서 '새책'이라 함은 책뿐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그대로 잊혀지고 사라질 뻔했던 그런 소중한 이야기들, 즉 우리네 사람살이와 문화, 역사의 흔적이 소롯히 담겨져 있는 그런 '새책'이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 - 함께살기 최종규의 헌책방 나들이

최종규 글 사진, 그물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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