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식민지 조선의 독립지사를 압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이 모태가 된 법. 민주와 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의 손에 오라를 채워 지하밀실로 끌고가 고문한 법. 자신이 지향하는 세상과 이념을 함부로 말할 수 없게 한 법. '악법 중의 악법'으로 불리는 국가보안법.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국민의 반대여론을 무시한 채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강행하고, 대미 굴종외교를 거듭하던 노 대통령에게 실망감을 느꼈던 기자는 최근 '국보법 폐지' 발언에서 '2002년 대선 이전' 노무현의 모습을 봤고, 실망감의 일정부분을 마음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이 비단 기자만의 것은 아닐 터.
필부가 아닌 지도자의 '결단'은 역사가 된다. 리더의 결단이 다수의 행복과 공익을 향해 있어야함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조 17대 왕 효종(1649∼59 제위)이 결단했던 '북벌론(北伐論)'은 과연 다수의 행복과 공익을 향해 있었던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이 질문에 답하는 소설이 출간돼 주목을 끈다. 방대진의 <왕의 반란>(당그래).
방대진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있다가 왕의 자리에 오른 효종이 중국왕조에 굽신거리는 것으로 일관했던 이전 왕들과는 태도를 180도 바꿔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의 정벌을 꿈꾸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국가보안법'을 정권유지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던 이전 정권과의 결별을 이야기한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보다 350여년이 앞서는 획기적이고 개혁적인 '결단'이다.
하지만 구습의 타파와 관행의 철폐란 세상 무엇보다 힘든 일. <왕의 반란>은 효종과 반청파(청나라에 반대하는 정파)에 대한 고난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즉위 직후 조선을 수탈해온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 준비에 착수하는 효종.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송시열 등의 반청파를 조정에 등용시킨다. 그러나 친청파로 파직 당한 김자점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면서 사건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전개되는데….
죽음도 '문장의 향기'만은 지우지 못했다
- 이문구 전집 <장한몽> 등 2차분 4권 출간
1965년 <현대문학>에 '다갈라 불망비'를 발표함으로써 시작돼 70~80년대를 풍미한 명천 이문구(2003년 타계) 문학의 전설. 한국 현대문학사를 건너온 그 어느 작가도 가닿지 못했던 휘황한 '구어체'와 질박한 '문장'으로 천년은 무너지지 않을 자기만의 성(城)을 축조한 대문장가의 전집이 '랜덤하우스 중앙'에 의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문학애호가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이번에 출간된 2차분은 이문구의 첫 장편 <장한몽>(전2권)과 작가의 선조이기도 한 이지함(1517∼1578)의 내면을 깊이 있게 읽어낸 소설 <토정 이지함>, 붕괴하는 농촌공동체의 삶과 토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려낸 초기 단편 모음집 <다가오는 소리> 등 모두 4권이다.
묘지를 옮기는 험한 작업현장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전쟁과 좌우대립의 비극을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장한몽>은 그 중 압권. 현대사의 혼란과 욕망의 끝없음, 세상과 불화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이문구만이 쓸 수 있는 문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배경이 공동묘지임에도 책에선 시체의 냄새가 아닌 국화 향기가 배어난다.
<다가오는 소리>에 수록된 '추야장' '만고강산' '금모랫빛' 등에서 보이는 능란한 입말의 사용은 이문구가 후에 이룰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의 성공을 미리 짐작케 한다. 김동리가 말한 바 '기이한 스타일리스트'의 풍모를 이문구는 1972년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이미 이뤄내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다.
말을 잃은 적군파, 소설로 부활하다
-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
"작가란 결국 불평분자"라는 김수영의 말처럼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에 가득찬 시인 혹은 소설가는 특이한 삶을 산다. 뿐이랴. 죽음조차도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기 일쑤다. 일본 작가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스트레스와 더 나아가지 않는 작품세계를 비관해 제 머리에 총을 쏜 가와바타 야쓰나리를 필두로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 본부에서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 실연의 상처를 견디지 못해 최음제인 '베로날 잘'을 복용하고 면도칼로 아킬레스건을 잘라 자살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등….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일본 팝 문학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사요나라 갱들이여>(향연)의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 역시 특이한 삶과 광기라면 앞서 언급한 작가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과격 적군파 출신에 투옥과 고문으로 인한 실어증, 거기에 10년이 넘는 방랑생활까지.
작가 스스로 "실어증을 극복하기 위해 썼다"고 고백한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완벽하게 파괴된 플롯과 의도적으로 해체시킨 이미지, 과장되고 왜곡된 문장으로 가득 찬 수수께끼와 같은 책이다. 하기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 역시 파괴와 해체,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곳이 아니었던가. 문학이란 어차피 세상의 반영.
자신이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상' 곁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던 실패한 혁명가 다카하시 겐이치로. 그의 삶은 독일의 시인 횔덜린의 그것처럼 '연소(燃燒)'가 아니었을지. 하여 책의 제목은 '잘 가라 혁명이여'로도 읽힌다.
| | 한 줄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신용목과 문태준 등 시집 출간 러시 | | | |
| | | | ⓒ문학과지성사 | 신용목 첫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내부의 응축된 힘이 외부의 형상을 밀어 가는 독특한 정경. 신용목의 시집에선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에게선 체감되지 않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힘의 발원지는 분명 간단치 않았을 시인의 삶이었을 터.
'어떤 이는 공원을 감옥처럼 여기며 살고, 어떤 이는 감옥을 공원처럼 살고 있다'는 저자서문은 이전 시대 시인들과의 진술과는 또 다른 감흥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친다. 느림과 빠름, 서술해야 할 때와 축약해야 할 때를 가려내는 솜씨가 20대 답지 않다.
문태준 시집 <맨발>(창비)
전작 <수런거리는 뒤란>을 통해 '뒤돌아볼 줄 아는' 젊은 시인도 있다는 걸 보여준 문태준의 두번째 시집. 생래적이라 할 그의 언어조탁력은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란 전언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한다.
임희구 시집 <걸레와 찬밥>(시평사)
독거 노인을 위한 '사랑나누기 온라인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시인. 세상사 거친 풍경을 따스한 시어 속에 녹여내고 있다.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책세상)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840년 칸트 윤리학을 전복시키려 하다. 16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고전이 주는 깨달음과 감동은 여전하다.
산도르 마라이 소설 <성깔 있는 개>(솔)
개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는 개를 먹는다 그러니까 개다'라는 어느 시인의 문장만으로 두 동물을 변별할 수 있을지. 헝가리 작가가 개를 통해 탐구한 인간세상.
한차현 소설집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문이당)
독특한 상상력과 보편을 뛰어넘는 감성. 사실주의 전통의 한국문단 풍토에서 '불쑥' 튀어나온 보석. 정련되지 않았기에 투박하고, 투박하기에 더 빛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