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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괴의가 그의 아들과 함께 관도에서 송하령을 기다렸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구양휘 등과 함께 내려온 담천의와 송하령을 보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사귄 사람처럼 그는 담담하게 맞이했고, 마차로 이곳 손가장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런 버릇없는 놈 보게나. 손님이 왔으면 빨리 안으로 모시지 않고 문전박대하려 하네.”
허물없는 괴의의 말에 손불이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놈아. 이 손불이가 손님 마다하는거 봤더냐. 하지만 너같이 어른 못알아 보는 돌팔이라면 내 딱 질색이다.”
“그래...? 그러면 돌아가야겠군. 뭐 나가는 즉시 손불이는 뭐....그거를 뭐라.... 하여간..”
그 말에 손불이는 갑자기 몸을 돌리는 괴의를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허허음...뭐 농담가지고 다 늙어 삐지냐....”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이 세상에 자신의 환자 비밀을 가지고 위협하는 돌팔이는 네놈 뿐일거다.”
“또 돌팔이..?”
“아니다. 아니야...네놈하고 싸워 이득본 적이 있나....나이살 조금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겨우 이십이일하고 두시진이 더 살았다고 나이살이냐....이놈아!”
친구라면 대개가 그렇듯 그들은 누가 형님이냐를 가지고 한번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결국 손불이가 이십이일하고도 두시진 먼저 태어났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손불이는 고아다. 자신도 모르는 나이나 생일이 사실 맞을리 없다. 그래도 괴의 갈유는 인정했다. 손불이는 그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알았다...이놈아..들어가자. 그리고 너 규아!”
괴의의 옆에 있는 그의 아들 갈인규(葛仁葵)를 손으로 가르켰다.
“그동안 별래 무강하셨습니까? 백부님.”
“별래 같은 소리 해라. 꼭 지 아비를 닮아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하지?”
갈인규는 자신을 기다린 사람이 누군지 안다. 자신을 키워 준 또 한명의 어머니다.
“어머님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은 나중 문제야. 이 백부가 들볶여서 아마 내 명줄 삼년은 갉아 먹었을거다.”
“시간이 나는데로 찾아 뵙겠습니다.”
“어휴..하는 말이 당장 가야...아니다. 나는 모른다. 네놈이 맞아 죽던지 말던지...”
그는 괴의 갈유의 손을 잡고 별로 손님을 들이지 않는 자죽헌(紫竹軒)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자죽헌의 풍취는 오히려 검소했다. 손불이가 언제나 손님을 맞아들이는 곳에 비하여 화려함이나 장식들은 오히려 투박할 정도였다. 귀한 자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는 것이 유일한 사치였다. 하지만 조용했고 투박함 속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손불이를 따라 들어간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서가화였다.
“언니...!”
그녀는 들어오는 송하령을 끌어안았다.
“가화야. 고생했지?”
“고생은 뭐......너무 편해서 탈이었지. 한바탕하고 싶었는데 도대체 나한테는 관심이 없나봐. 코빼기도 안보이던걸.”
“다행이다. 걱정은 되도 너니까 믿었지.”
잔잔하게 미소를 띠우는 송하령을 보고는 서가화는 얼굴을 찡그렸다.
“언니가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 언니가 이리 되도록....”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옆에 들어오던 담천의를 쏘아 보았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뭐한거야. 자신 있다고 하더니...”
담천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 있다고는 하지 않았소.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이지 뭐가 달라요. 하기사 지 꼴도 저러니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서가화가 왜 그러는지 담천의도, 송하령도 알고 있다. 그녀를 보호한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녀 혼자 미끼노릇을 시킨 것이다.
“그만해.....저 분 많이 고생했어.”
송하령이 담천의를 두둔하자 서가화의 눈이 샐쭉해진다.
“어머...그 동안 저 인간과 정이 들었수? 별일이네. 남자라곤 아예 말도 않던 언니가..”
“가화야..”
송하령의 사정조에 서가화는 입을 다물었다. 저 인간이 괜히 밉다. 냉정하게 보면 자신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자신이 그 상황에서 결정하라고 했다면 자신 역시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괜히 원망스럽다.
하지만 가슴에 핏물이 비치는 담천의에게 더 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따라 들어오던 팽악의 호들갑에 그녀는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오...서소저 아니시오. 이 팽모는 일년전 서소저를 뵌 이후로 꿈에서라도 다시 뵙길 학수고대 했었소. 드디어 이곳에서 뵙게 되다니 천지신명이 이 팽모의 소원을 들어 주신 것 같소.”
숨 한번 쉬지 않고 마치 연습한 대사와 같이 줄줄이 쏟아 냈다. 사탕발림도 이 정도면 정말 수준급이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비위가 상할 아첨이다. 그러나 말하는 팽악의 얼굴에는 농담하고 있다는 일말의 표정도 없다.
그렇다고 팽악이 저렇게 말할만큼 서가화와 가깝다거나, 사모해 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팽악이 미녀만 보면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마음을 끌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서가화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천지신명이 이제는 망령이 났군요.”
지금 괜히 기분이 안 좋은데 화풀이 상대다.
“아이쿠...이거 때를 잘못 택했나...?”
팽악이 그녀의 느닷없는 화풀이에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더 뭐라고 쏘아 붙이려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구양휘를 보고는 다소곳이 예를 취했다.
“구양대협께서 오셨군요.”
“오랜만이군. 벌써 이삼년 되었나...? 그 때는 봉우리만 맺혀 있더니 이젠 활짝 피었구나.”
구양휘의 입에서 저 정도의 말이 나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칭찬이다. 구양휘는 본래 여자에 관심이 없다. 아니 여자 뿐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검이다. 그런 구양휘가 저런 칭찬을 했다는 것은 서가화의 미모가 정말 뛰어나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의 칭찬에 서가화는 가볍게 몸을 숙이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허...이러다간 밤을 새겠군. 자...모두들 자리에 앉자봅시다.”
주인인 손불이는 이미 간단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둥그런 탁자에 앉기를 권했다. 좌석은 모두 열두좌석. 대개 주인이 상석에 앉지만 상석도 없고 말석도 구분되지 않는 원형의 탁자다. 손불이는 친구를 맞을 때 절대 상석에 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구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개 상석의 구분이 없는 원형의 탁자를 이용한다. 자리는 두개가 남았다. 갈유 일행이 여섯, 서가화와 주인인 손불이, 그리고 이미 자죽헌에 있었던 두사람이다.
“어...언제부터 손가장이 이렇게 가난해졌나?”
앉자마자 괴의 갈유의 음식투정이다. 사실 탁자위에 차려진 음식은 간단한 채소요리와 부용해(芙蓉蟹) 정도였다.
“허참....걱정마라. 갈가야. 네놈 생각해서 마라우육(麻辣牛肉)하고 회과육(回鍋肉)을 특별히 준비하라 했는데... 영 마음에 안들어...”
마라우육과 회과육은 맵고, 진한 사천지방의 요리다. 괴의 갈유는 사천성(四川省)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사천을 떠나온지 벌써 이십년이 넘는다. 사천요리를 다른 곳에서 먹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갈유는 언제 투정을 부렸나는 듯 희색이 만면하며 손을 황급히 저었다.
“역시 내 생각해 주는 사람은 손가 자네 밖에 없어. 암 그렇고 말고...”
그는 손불이가 다른 말을 할까봐 황급히 채소무침의 일종인 파리백채(菠離白菜)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으로 가져갔다.
“역시 ...맛 있어..”
“그렇다고 인사도 없이 먹기는.....인사나 나누게.”
손불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 분은 금의위 영반으로 계시다 요새 황상을 직접 모시고 있는 전영반이시고...”
소개를 하자 전연부가 일어나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전연부라 하오. 말로만 듣던 분들이 계시는 자리에 끼게 되어 송구스럽소이다.”
천비수 전연부는 서가화를 뒤쫒아 이곳까지 왔다. 다행히 손불이와는 이미 안면이 있어 굳이 이 자리에 끼었던 것이다.
“또 한분은...”
손불이가 소개하기도 전에 도복(道服)을 입은 사십대 전후의 사내가 자신을 밝혔다.
“무당(武當)의 말학 현진(玄眞)이오이다.”
눈빛이 맑고 깊다. 현 무당파 장문인인 청허자(淸虛子)의 수제자요, 차기 무당을 이끌어 갈 인재다. 잔잔하게 가라 앉자 있는 그의 기도와 수양이면 이미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우연히 손대인 댁에 들렀다가 대명이 자자한 분들을 뵈오니 영광이오.”
우연히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차기 장문으로 인정되고 있는 인물이 어디 함부로 나돌텐가? 손불이는 지나가는 투로 의혹스런 기색의 갈유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현 황상께서 부르셔서 북경에 다녀오다 들르신 거라네.”
사실 대명 건국에 있어 원의 잔당을 몰아내는데 가장 힘썼던 곳이 무당이다. 또한 그로 인해 피해가 가장 컸던 곳도 무당이다. 무당의 본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대명 건국 후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무당은 특히 많은 지원을 받아 새로 신축해야 했다.
특히 영락제는 무당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고 무당의 원로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자문을 받으려 한다는 말도 돌았다. 실제 무당에서 도인은 세속 일에 참여하기 어렵다 하여 입궐하지 않았다 하니 그 진위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영락제의 무당에 대한 관심은 이미 알려져 있는 터였다.
“자...이제 변변치는 않으나 어서들 드십시다.”
손불이의 말에 좌중은 젓가락을 들고 차려진 음식을 자신 앞에 놓인 접시에 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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