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단의 섬 마라도는 왜 그리도 멀리 있었을까?
제주에 정착하면 가장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 곳 송악산 선착장에 이르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곳이 오히려 가장 먼 곳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파도가 제법 높지만 가을 하늘도 한껏 높아 최남단 마라도를 향하는 이들의 마음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 호박엿장수의 신명나는 가위질소리와 음악소리에 취한 듯 몇몇 아주머니들이 '관광버스댄스(?)'로 선착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어쩌면 추잡해 보일 수도 있었을 터인데 오늘은 정겹다.
사람을 가득 실은 배가 온다.
저 사람들이 내리면 이제 저 배를 타고 최남단의 섬 마라도에 갈 것이다. '최남단'이라는 말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곳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시작과 끝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돌아감'이 필요 없다는 말이니 죽음이 없다는 말과도 통하는 것일까?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를 만난 탓인지 아니면 늘 그랬는지 모르겠다.
날치가 바다를 난다.
정말 날개가 있고 비행시간도 10초 이상이나 되는 것 같다.
여느 물고기들이 물에서 뛰는 정도인줄 알았는데 정말 새처럼 난다.
그렇게 날치의 비행에 취해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마라도와 나는 밀착되어간다.
'아, 저기 길이 보인다. 등대도 보이고 집도 보인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길이 있기 마련이고 바다가 있는 곳이면 등대가 있기 마련인데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장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섬을 돌고 보니 꽤 큰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느낌과 나중의 느낌은 다른 법인가 보다.
후쿠오카가 서울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상하고 낯설다.
그래서 최남단이구나.
실감나는 순간이다.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팔각정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넉넉해 보인다. 잠시 바쁜 일상을 떠나 쉼의 시간, 휴식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일 터이다.
충청도에서 왔다고 자기를 소개한 할머니는 "이게 우리나라 제일 남쪽이란 말이쥬.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유"라고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이 영락없는 충정도 사투리다. 할머니도 참,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시네.
마라도교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 곳은 누가 지키고 있을까, 이 곳 주민들이 얼마 되지도 않을 터인데 누가 지키고 있을까?
종교가 권력의 노예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한다. 모든 종교가 본연의 길을 가지 못하면 민중의 아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등대.
어두운 밤바다에서 긴 밤을 지새우는 어부들만이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은 아닐 터이다. 생전 고깃배 한번 타보지 못한 이들이라도 밤바다에 서 본적이 있다면 그 등대의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했을 터이다.
등대 같은 삶.
그런 삶을 늘 소망하면서도 내 마음은 항상 어둠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최남단 마라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각별하다.
섬에서 섬을 바라보는 심정도 각별하지만 외로운 대지라 불리는 변방의 섬 제주의 변방인 듯한 작은 섬 마라도에 서있는 나라는 존재도 각별하게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의 심정을 아는 듯, 저 심연의 바다 속에는 아무도 모르게 맞잡은 손이 있을 터이다.
갯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어 마라도의 가을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사는 작은 별과 같아서 이렇게 흐드러지게 피면 온 섬을 가득 채울 것만 같다. 그러나 마라도가 얼마나 넉넉한지 아직도 꽃의 향기가 그립다.
그 곳에 서있으면서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 곳에서 서서 남쪽을 바라본다. 검푸른 바다의 수평선이 선명하다. 저 바다는 생명의 바다, 시작과 끝이 한 곳에 있는 최남단의 섬 마라도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