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비를 뜻하는 말들을 얼마나 알까? 우리말에는 가랑비, 달구비, 떡비, 먼지잼, 모종비, 목비, 무더기비, 보슬비, 비꽃, 여우비, 웃비, 이슬비, 자드락비, 밤비, 채찍비, 날비, 는개, 바람비, 발비, 비보라, 억수 등의 많은 비가 있는데도 대부분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 아니던가?
요즘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쓰는 글을 보면 이런 토박이말은 거의 사라지고, 잘난 체하기 위한 어려운 한자말과 외래말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결국, 일반인들은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고, 글쓴이의 뜻이 읽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펴낸 목적이 달성될 수가 없음이다.
몇 해 전 전통문화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한 전문가가 책을 써냈다. 추천까지 되어 유명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몇 쪽 읽다가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온갖 전문용어에 한자말과 외래말이 난무하는 책에 나는 사랑을 줄 수가 없었다. 그 책뿐 아니라 대다수의 전통문화 책들도 그런 잘못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대중들이 우리 문화를 알 수가 없고,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중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말에도 신분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지배층의 어려운 한자말이 득세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일본말을 퍼뜨렸으며, 해방 이후에는 영어를 잘해야 대단한 사람인양 뻐기는 층이 늘어나 말은 신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처럼 되었다. 이제 세계화와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 우리말은 점점 외래말에 안방을 내줄 처지가 되어버렸다.
뮤지션이나 웰빙이라고 하면 유식해 보이고, 음악가, 참살이라고 하면 유치하게 들리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법률용어를 보면 ‘갚다’, ‘다 갚은 날’, ‘주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변제’, ‘완제일’, ‘교부하다’라고 ‘고며고며 타령’을 한다.
알기 쉽게 하면 법률가들의 밥벌어먹을 여지가 적어져서인가? 많은 의사가 ‘혈압’을 ‘BP’로, ‘병실’을 ‘ward’라 하고, ‘삐었다’를 굳이 ‘염좌’라고 하는 것은 환자들이 알아듣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줄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을 지르는 것은 언론이다. 특히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무분별한 말투는 일반인들의 말글생활까지 더럽힌다. ‘와이프’니, ‘화이팅’이니, ‘게스트’니 하는 말을 당연한 듯 쓰는 것은 그들의 유식함이 아니라 문화사대주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법률가와 의료인, 연예인들이 진정 시민과 환자, 팬을 위한다면 쓸데없는 외래말과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래말과 한자말을 자제하고, 우리의 토박이말을 살려 쓸려면 그것을 알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가르쳐주는 책도 고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이런 우리의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말들을 잘 소개하는 책이 나왔다.
박남일님이 쓰고, 서해문집이 펴낸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 사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경우가 내게도 많았었는데 이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 책은 1부 우주와 자연, 2부 생물과 사물, 3부 사람과 사회, 4부 경제활동, 5부 일상생활과 문화로 구분하여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600여 개의 올림말을 풀이했고, 나머지 여줄가리 올림말 1100여 개를 여러 사전풀이를 대조하여 그 풀이 내용을 알기 쉽도록 간결하게 다듬는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재미있는 토박이말들을 살펴보자. 특히 다음의 말들은 우리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또는 외래어나 한자어에 익숙하여 그냥 쓰고 있는 말이지만 바꿔 쓰면 정말 좋을 것들이다.
‘생활폐수’→‘개숫물’ 또는 ‘고장물’, ‘이면도로’→‘속길’, ‘그린벨트’→‘말림갓’, ‘헤드라이트’→‘머리등’, ‘혈액형’→‘핏본’, ‘스폰서’→‘벗바리’, ‘촌지(寸志)’→‘꾹돈’, ‘일광욕’→‘해쪼이’, ‘대질(對質)’→‘무릎맞춤’, ‘리허설’→‘앞잔치’, ‘아르바이트’→‘가다리’, ‘미봉책’→‘풀땜질’, ‘전시행정’→‘장사 웃덮기’, ‘셀프서비스’→‘제시중’, ‘할부(割賦)'→‘드림셈’ 따위의 토박이말은 정말 재미있고, 정감어린 말들이다.
내가 이런 토박이말들에 더더욱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글쓴이가 친절하게도 재미있는 설명을 해주고 있으며, 이런 말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생생하고 감칠맛 나는 예문으로 맛보여 준데 있을 것이다. 지은이는 소설을 전공한 탓으로 또 사람을 껴안는 철학으로 예문을 만들어낸다.
그 중 한두 예를 들어보자.
‘도둑눈’: 밤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내린 눈. “ 한지 창으로 유난이 하얀 빛이 비쳐드는가 싶더니 이내 마당에서 ‘워매, 도둑눈이 겁나게 내렸어야!’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정겹다.
‘말살에 쇠살’: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갔는데 벌건 말고기를 쇠고기라고 내놓는다. 누가 보아도 가짜다. 그래서 따졌더니 주인은 쇠고기라고 벅벅 우긴다. 번연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우기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쓰는 말이다. "법치주의 신봉자들은 법이 대다수 민중의 삶보다 위에 있다고 한다. 이는 말살에 쇠살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가?"
다만 이 책에도 옥의 티가 약간 있다. 의식주의 ‘옷과 장신구’ 쪽에 보면 ‘진동’이란 여줄가리 올림말이 있는데 “소매의 겨드랑이 밑의 넓이”라고 설명했지만 정확한 뜻은 “저고리 소매의 어깨선에서 겨드랑이까지의 폭”이라고 해야 한다. ‘곁마기’, ‘배래기’의 설명도 잘 맞지 않는다.
또 ‘풍물굿’을 ‘농악(農樂)’이라고 썼다. ‘농악’이라고 하면 농민들만 즐기는 것으로 한정 짓는 문제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의 탈놀이 능악(能樂)의 발음인 '노가꾸'를 본떠서 만든 말이라는 의심을 받는 것이어서 좋은 말이라 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사전이기에 올바른 설명을 위해서 ‘한국복식문화사전(김영숙)’, ‘한국민속대사전’ 따위의 관련 사전을 참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동안 습관처럼 써오던 말글생활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면들이어서 일부러 흠을 잡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훌륭함을 덮기에는 어림도 없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글쓴이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을까? 자못 궁금하여 작업실이 있는 목포에 전화를 건다.
-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나요?
“제가 소설 공부를 할 때 문장에 어울리는 낱말을 찾아 쓰기 위해서 아주 오래 된 국어사전을 손때가 묻어서 해질 정도로 뒤적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국어사전에 엄연히 표준말로 올라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많이 잠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막상 그런 말을 문장에 실제 써보려니까 왠지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고전이나 문헌에서 어원도 찾아내고, 또 다른 분들께서 펴내신 우리말에 관한 자료들을 참고해서 현대적으로 말뜻을 풀어보고, 또 그 말이 가지는 시대적, 문화적 의미와 실제 문장에서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이 책을 썼습니다."
- 책을 쓰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고심했던 것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가장 고심했던 것은 현대적인 느낌을 어떻게 토박이말에 불어넣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토박이말이 살아 있는 말로 다가오게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문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어렵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습니다. 예문은 무미건조한 것이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문화적인 사연을 응용한, 산문이나 소설에 쓰이는 것들로 했습니다."
- 예문은 거의가 직접 쓰신 것들로 아는데, 이에는 글쓴이의 철학이 배어나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예문이 나오게 되었는지?
"평소에 저는 문학이 엘리트주의와 민중성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은 민중성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작가들이 문화권력에 욕망을 가질 때는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글쓰기 기능에만 충실하면 그것은 단순히 기술입니다. 그 곳엔 진정한 예술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예전부터 야학에도 참여하고, 시민운동에도 관여하면서 쌓였던 생각들일 것으로 봅니다.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 거겠지요."
- 책이 나온 이 시점에서 정부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한글날 국경일은 당위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말글의 발전은 당위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보해주는 실질적인 게 필요합니다. 법과 제도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자국어를 보호하는데 모범인 프랑스처럼 '국어보호법'을 만든다든지 하여 국가적으로 원칙을 잡아주고 뜻있는 사람들이 이를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글 쓰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문화는 상품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책을 써도 팔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냈는데 현재 재판이 발간되고 있고, 이런 추세라면 3판도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인터넷서점에는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합니다. 이 얘기는 우리 문화 책도 변별력만 제대로 갖춘다면 당위성만이 아닌 상품성도 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민족적인 정서를 끄집어내어 토박이말로 잘 다듬는 좋은 우리문화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쓴이는 인터뷰를 하면서 이것은 작은 본보기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시작일 뿐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다시 살려내고 뿌리내리는 작업이 완성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한다.
흔히 갓 결혼한 신랑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잠자리하는 것을 ‘첫날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말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토박이말에 ‘꽃잠’이 있다. ‘첫날밤’보다 훨씬 정감있게 다가오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술을 또 다른 말로 ‘도깨비뜨물’이라고 한다. 막걸리는 그 빛깔만 보면 허연 쌀뜨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많이 마시면 무슨 조화를 부려서 사람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한다. 술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과 함께 과음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말과 설명이 이 책에는 그득하다. 글 쓰는 이들이 이 책을 활용하면 훨씬 정감있고, 알찬 글을 써낼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나는 이 책에서 소개한 ‘솔개그늘’이란 말에 흠뻑 빠졌다. ‘솔개그늘’이라는 말은 솔개가 날 때 땅에 생기는 작은 그림자처럼 아주 작게 지는 구름의 그늘을 말한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여름날, 들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다보면 솔개그늘이라도 정말 고마운 것이다. 나는 주위에 솔개그늘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다짐을 한 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