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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사상사
1. 모든 소멸은 슬프다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옳다. 찌뿌드드한 월요일 아침이 확 깨어났다. 내 어줍지 않은 의식이 퇴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카프카의 말이 떠올랐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김훈의 소설 <화장>은 차라리 도끼였다. 그 도끼에 나의 내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전긍긍했다. 하나의 텍스트가 나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와 작렬하는 느낌, 감수성의 가장 예민한 곳으로 파고 들어와 찌르고 문질러대는 느낌. 김훈의 소설은 하나의 비수요 뇌관이었다.

소멸이란 우주적 질서로의 복귀라는 스토아 학파의 논설이 부동(不動)의 평정심까지 길러줄 수 있을까. 달관이니 초연이니 해도 죽음은, 소멸은 어떻든 슬프다. 탄력을 잃어가는 몸을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무상(無常)이라 했다. 항상성(恒常性)은 불가능한 꿈이다. 항상 있는 것은 결국 없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권력이요, 돈이요, 청춘이요, 몸이다. 몸이 있을 때만 세상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 몸뚱이도 제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부풀고 팽창하고 지랄염병을 떨다가는 조금 쿨해질만 하면 시들시들 낡아간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것은 그의 하초 때문이라고 말했던 이는 니체였던가.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삐거덕 와당탕 제멋대로다.

2. 두 개의 육체

김훈의 소설 <화장>에는 두 개의 육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시들어 가는 육체요, 하나는 피어나는 육체다. 시들어 가는 육체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피어나는 육체는 연정을 불러일으킨다. 신파는 대체로 후자를 선호하고 도덕주의자는 전자를 선호한다. 김훈은 그 두 개의 육체를 교차시킨다. 그 교차 지점에서 삶은 부풀어 오르고 신음하고 오열한다. 열락과 고통의 아수라장이다.

연민은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이고, 연정은 욕망에 전전긍긍하는 몸의 영역이다. 욕망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연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연민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성찰과 반성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화장>은 성숙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탐스런 육체를 바라보는 늙지 않는 욕망, 그 불꽃의 '에네르기'가 행간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의 몸은 똥내, 지린내…. 악취의 창고다. 아내의 몸은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앙상하다. 2년 동안에 세 번의 수술을 받은 아내의 몸은 만신창이다. 두통이 나면 위액까지 토하고 실신을 하고, 실신을 하면 항문의 괄약근이 열려서 똥이 흘러나온다. 간병인은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마다 향을 피우고 마스크를 쓴다. 아내를 돌보는 사이에 그는 그가 맡은 음식의 냄새가 과연 음식의 본래 냄새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몸속에 종양이 존재하듯이 음식 속에 원래부터 구린내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어쨌든 병든 아내의 몸에도 한때는 젊음의 싱그러움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그 몸에도 놀라운 탄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늘어진 피부에는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피어 있고, 성기는 과연 그것이 생명을 수태하고 밀어냈던 문(門)이기나 했었던 것인지 축 늘어져 있다. 몸이랄 것도 없는 몸, 악취의 창고인 몸을 남편인 '나'는 씻긴다. 처연하다.

저는 샤워 물줄기로 바닥에 떨어진 똥물을 흘려보내고 다시 아내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아내의 항문과 똥물이 흘러내린 허벅지 안쪽을 다시 씻겼습니다. 환풍기를 켜서 욕실 안의 냄새를 뽑아냈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 침대에 뉘었습니다. 아내는 자꾸만 울었습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가늘고 희미했습니다.

작가는 몸의 너저분함을 표현하는 데에 일체의 미학적 군더더기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그는 똑바로 악취 나는 몸을 응시한다. 우회하지 않는 시선, 똑바로 너저분한 몸뚱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몸에 대한 연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화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고, 더러움을 더러움 그 자체로 수용하겠다는 의지, 나는 너를 너로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지. 그것이 추(醜)이든 미(美)이든 사랑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

또 하나의 몸뚱이가 있다. 추은주(秋殷周), 그녀에겐 풋풋한 사과향이 풍긴다. 추은주, 5년 전에 그의 회사에 입사한 젊은 여자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고대 국가를 생각한다. 잃어버린 국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다. 무상(無常)의 다른 이름이요, 영속하는 것은 없다는 허무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입사한 지 5년 동안에 시집을 갔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그 5년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단지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하염없는 욕망의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탐욕스럽지만 안쓰러운 눈이 바로 '그'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그는 끊임없이 추은주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비밀에 헌신한다. 아무리 그가 추은주의 이름을 불러도 그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껍데기다. 그러나 부재의 공간에 그녀를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다. 끊임없이 이름을 부를 수밖에.

추은주를 묘사하는 곳에서 김훈의 문체는 장황하고 아득하고 처연해진다. 혹여 추은주의 아름다움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문체는 조바심을 낸다. 그러나 어떤 장황한 헌사(獻辭)가 그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을까. 언어는 실체에 닿지 못하는 하염없는 불길이 아니던가. 제 풀에 꺾여 언젠가는 스러지고 마는.

당신의 가슴의 융기가 시작되려는 그곳에서 당신의 빗장뼈는 당신의 가슴뼈에서 당신의 어깨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빗장뼈 위로 드러난 당신의 푸른 정맥은 희미했고, 그리고 선명했습니다. 내 자리 칸막이 너머로 당신의 빗장뼈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의 손으로 저의 빗장뼈를 더듬었지요.

그때,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의 깊은 오지까지도 저의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여자인 당신, 당신의 깊은 몸속의 나라. 그 나라의 새벽 무렵에 당신의 체액에 젖는 노을빛 살들, 그 살들이 빚어내는 풋것의 시간들을 저는 생각했고, 그 나라의 경계 안으로 제 생각의 끄트머리를 들이밀 수 없었습니다.


추은주의 몸에 손을 뻗고 싶지만 그에겐 병든 아내가 있다. 도덕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아내의 병든 몸의 대체물로서 젊은 여자의 몸뚱이라는 말인가. 현실은 냉정하다. 그의 욕망이 발설되는 순간 그를 비도덕주의자로 단죄할 것이 분명하다. 사랑과 욕망은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그것은 자신만의 내밀한 동굴을 필요로 한다. 광장은 그에게 적이다. 그는 그 적이 두렵다. 그는 잘 나가는 화장품 회사의 중역이 아닌가. 그는 광장의 사람이다. 그러나 광장의 사람일수록 억눌러온 내면의 욕망은 큰 법이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의 비사회성을 이렇게 묘파한 적이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연인들, 부부들이란 동일한 인간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욕과도 결혼과도 대립된다. 사랑은 도둑질에 속하지 사회적 교환에 속하지 않는다.…태고의 어둠 이래로 사랑에 빠진 자는 오래 전부터 그의 가족, 친척들, 그리고 집단이 그에게 마련해준 교환에서 빠져나온 여자 혹은 남자를 가리킨다.

그의 내면은 격렬하게 추은주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홀로 비밀을 간직한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광장의 사람이다. 그녀를 갖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화장(化粧)을 필요로 한다. 김훈의 문체가 장황해지고 아득해지고 처연해지는 곳도 이 대목이다. 이성의 감시, 도덕의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문체는 자꾸 아름다워진다. 젊은 여자의 몸을 이렇듯 미학적으로 포장한 소설이 몇이나 있을까.


3. 가벼움과 무거움

주인공의 몸은 무겁다. 욕망 때문이기도 하고, 전립선염으로 가득 차오르는 오줌 때문이기도 하다. 욕망이나 오줌이나 주기적으로 물꼬를 터주어야 하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사연이 그러니 몸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오줌은 아쉬운 대로 해소 방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욕망은 다르다.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병든 아내와 가질 수 없는 그녀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상무로 있는 회사의 화장품 광고 카피의 콘셉트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할 때 그가 고른 것은 '여성의 내면여행'이라는 무거움이 아니라 '여름에 여자는 가벼워진다'라는 가벼움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더 이상 무거움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이 아닌가.

병으로 30킬로그램으로 체중이 빠진 아내의 몸은 가볍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무겁다. 남편을,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찌 가볍겠는가. 병든 아내를 바라보아야 하고, 젊은 여자의 몸을 욕망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무겁다. 이 소설이 묵직하게 읽히는 것은 이런 무거움 때문이다.

가벼운 서사들이 범람하는 곳에 김훈의 이런 무거운 서사는 미덕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 무거움을 중화시키는 것이 추은주의 육체다. 그녀의 '깊은 오지'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 그녀의 혈관을 타고 그녀의 몸 속 깊은 곳까지 흘러가고 싶은 그의 욕망, 끝없이 속삭이고, 끝없이 침투하고, 자신의 전존재를 투여하고 싶은 욕망, 그녀를 온통 제 안으로 빨아들이고 싶은 욕망, 그는 그 욕망의 주체할 수 없는 주체다.

어쩌다가 회사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당신과 마주칠 때, 당신의 몸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젖 냄새가 풍겼습니다. 엷고도 비린 냄새였습니다. 가까운 냄새인지 먼 냄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냄새였지요. 확실하고도 모호한 냄새였습니다. 당신의 몸 냄새는 저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볶음밥을 먹으며 야근하는 저녁에 저는 저의 자리에 앉아서, 당신의 모든 의식과 기억을 풀어 헤쳐서 다만 숨 쉬게 하는 당신의 잠든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잠들 때, 당신의 날숨이 당신의 가슴에서 잠든 아기의 들숨 속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아침이 오도록 당신의 방에서 익어가는 당신의 몸 냄새를 생각했습니다. 여자인 당신의 모든 생물학적 조건들 속에 깃드는 잠과 당신이 잠드는 동안 당신의 몸속에서 작동하고 있을 허파와 심장과 장기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 속 실핏줄 속을 흐르는 피의 온도와 당신의 체액에 젖는 살들의 질감을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의 살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풍문과도 같았습니다.


한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송두리째 빨아들이겠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닌가. 그를 내 안으로 남김없이 불러들이겠다는 욕망.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소유의 욕망이 아닌가. 너를 남김없이 내 안에 두고 싶다는 죽임의 충동, 나를 너 안에 모두 디밀어버리고 싶다는 죽음의 충동,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동전의 양면처럼 먼 곳에 있지 않다.


4. 은밀한 생

다시 키냐르의 표현이다.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그렇다. 사랑은 분리와 격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애써 이해받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정형의 에너지다. 그것이 우리의 몸을 출렁이게 하고 열락에 들뜨게 한다. 그러나 과연 분리와 격리가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여전히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유한적 존재요, 식솔들에 묶인 사회적 존재다. 소설의 주인공 또한 묶인 존재다.

아내가 병들지만 않았어도 문제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병든 아내를 버려선 안 된다는 이성의 계율, 그는 그 계율 앞에 무릎을 꿇는다. 혹자는 이런 패배를 소시민성의 발로라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치기 어린 낭만주의 문학이 낭만주의적 패배를 하이톤으로 보여주었던가. 얼마나 많은 신파가 눈물과 콧물의 우여곡절을 연출했던가.

김훈의 소설은 절대로 신파나 낭만주의로 퇴행하지 않는다. 아파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여간해선 신음소리를 내지르지 않는 것이 김훈 소설의 남성성이다. 그는 확실히 힘에 집착한다. 그는 어금니를 사려물고 지그시 침묵한다. 그 힘과 침묵의 실체가 김훈 소설의 미학은 아닐까. 슬쩍 곁을 주다가도 돌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부동의 현실감각. 바로 그런 현실감각은 한국문학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예에 속한다.

김훈은 <화장>으로 200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6명의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화장>을 추천했다. 다음은 심사위원인 소설가 서영은의 평이다.

김훈의 <화장>은 지금까지 써진 한국소설을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비장하고 잔혹한 소설이다. 그 잔혹함은 작가의 덕목인 산문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신기루와 아비규환을 하나의 얼굴로 가진 삶이란 저 오묘한 수수께끼를 이토록 여지없이, 명징하게 파헤칠 수 있었을 것이다.

육체로 사는 모든 산 것들이 무로 환원되는 대역정, 그 시작과 끝, 겉과 속, 앞과 뒤를 사회학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메처럼 날카로운 금속성 문체로 저미고 파헤쳐서, 한 점 연기로 시화할 때까지 몰아가는 이 소설은, 차라리 존재의 근원을 고찰한 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이 소설은 허허로운 삶을 수시로 돌아보며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무릎 가까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몸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는 윤회를 거듭한다지만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우리의 몸은 단 한번뿐이다. 아름다움도 사랑도 한 번뿐이다. 김훈의 「화장」을 옆에 둔다는 것은 그 허망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문학사상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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