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뻘건 단풍소식이 남녘 끝에서 꼬리를 내민다. 주인을 잃은 가을이 텅 빈 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다.
봄바람에 바람난 처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주말, 발길 닿는 곳이 모두 가을이다. 그 텅 빔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여행이 최고다.
사람마다 여행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내가 즐기는 여행은 꼭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저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나는 좋아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어쩌다가 조수석에 말벗이 되어 줄 사람이 있으면 더욱 신이 난다. 그런데 오늘은 그 조수석에 가을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제주시에서 서쪽 방면으로 가는 12번 도로에는 키 작은 가을꽃이 무리를 이뤘다. 12번 도로 왼쪽에 피어있는 빨간 꽃, 노란 꽃들이 가을 마중을 나왔다.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하다.
가을꽃은 뭐니뭐니 해도 국화가 아닌가 싶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는 한림공원. 한림공원은 텅 빈 가을하늘에 수를 놓은 것처럼, 송이송이 꽃망울을 터트린 노란 소국이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국화 향기만큼이나 진한 커피를 자판기에서 빼든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목에 축이기도 전에 노란 소국에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아본다. 그가 맡아본 국화 향기는 어떤 색깔이었을까?
빨강, 주황, 노랑, 하양. 마치 가을 하늘에 물감을 뿌려 놓은 듯 10만 송이 국화 꽃송이가 국화거리를 만들었다. 그 꽃길 사이를 걸어 볼 수 있는 여유가 늦가을이 주는 특별함이다.
보송보송 깔아 놓은 융단 위를 걷는 기분이랄까. 보기만 해도 푹신푹신하게 느껴지는 아득함을 국화 꽃송이에서 느껴본다.
벌과 나비도 제철을 만난 듯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며 꿀을 딴다. 그 모습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달짝지근한 맛, 그 맛을 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한 마리 호랑나비가 깊은 가을 잠에 빠져 있다. 휴식을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국화 꽃잎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국화꽃 사이를 걷다보니, 가을 하늘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또 하나의 계절이 있다. 보기만 해도 풍요로워지는 풍경이 가을 하늘을 수놓는다.
하늘을 찌르는 꽃 탑은 계절의 종착역이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그리고 정겨운 사람들끼리 카메라를 들이대며 추억을 나누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종착역을 향해 줄달음쳐 왔다. 그래서 인지 꽃 탑 아래 서 있으니 내 마음속에 꽃 탑을 쌓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을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한림공원 국화전시장에서 꽃길을 걷다 보니 짧은 가을 해는 어느덧 늦가을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계절의 환절기에 형형색색 그림을 그리는 국화꽃 송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