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나무잎새 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심산유곡 아흔 아홉 골
겨울이 초입에 들어선 11월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한밤중에 내린 가을비가 마지막 남은 가을 이파리를 스쳐 지나가면 가을은 완연히 옷을 벗는다.
구르몽의 시가 생각나는 계절, 아침에 일어나 야외 주차장에 갔더니 자동창 앞 유리 면에 낙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지난 봄, 예쁜 꽃을 주었던 벚꽃 이파리, 그리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어느새 생을 마감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진 것이다.
삶의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 자동차는 억새꽃이 늙어 가는 1100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입동 날 아침 심산유곡 아흔 아홉 골에는 '우수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했다. 산이 깊으면 내 마음도 깊다 했던가? 아흔 아홉 골 금봉곡 가는 길은 지난 계절의 신록과 푸르름을 담은 가을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고운 사연 담아서 가을 길에 띄우면
빨갛게 익은 단풍잎 하나가 '뚝'하고 떨어지더니 조릿대 이파리에 내려앉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낙엽 하나 하나에 묻어 있는 가을 편지가 구구절절 떠오른다. 어느 시인의 '가을 편지'를 가슴에 새기며 고운 사연을 담아 가을 길에 띄워 본다.
마땅히 전해 줄 사람 없어
떨어지는 낙엽하나에
고운 사연 담아서 가을 길에 띄우면
스치는 바람이 읽어 가다가 나의 마을을 셈하고
사연의 주인을 찾아 가을을 흔들고 다닌다.
당신의 뜨락에 떨어진 낙엽 한 장 가만히 펼쳐보면
내 마음이 담긴 가을 이야기가 가슴으로 파고들며
더욱 성숙해진 목소리가
당신의 가을을 지켜 줄 것입니다.
낙엽 속을 거닐며
낙엽으로서는 지난 추억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가지에 새싹을 틔우는 산고의 아픔을 딛고 신록을 키웠던 봄날의 기억. 무던히도 더웠던 지난 여름, 햇빛과 싸우며 세상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이파리들의 고통.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아 열을 식혀 주었던 푸른 이파리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까.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가을 산을 물들였던 단풍은 이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떠나가고 있다. 금봉곡 가는 길은 하늘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제 할 일을 다한 낙엽이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으니 지난 추억을 생각하기보다는 영혼처럼 우는 무상을 생각한다.
30분쯤 걸었을까? 마치 천국의 계단인양 가파른 산 속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마다 차곡차곡 쌓인 낙엽 위를 한발자국 한발자국 밟아 보는 기분. 세상의 번뇌를 잠시 식혀보는 시간이다. 입구에서는 초겨울이었는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니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흘러내린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금봉곡 석굴암 가는 길은 대화 나눌 사람이 없어도 좋다. 두런두런 떨어지는 낙엽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옛사람이 생각나기도 하고, 책갈피에 낙엽을 묻으며 추억을 넘겼던 학창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겨울 산을 지키는 새 한 마리와 인사를 나누면 어느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바라보니 학창시절 배웠던 이효석 님의 '낙엽을 태우며'가 생각난다.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와 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 땅 속에 깊이 파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낙엽 속에 묻은 철학이 가슴 뭉클해지는 계절이다.
금봉곡 가는 길은 오르막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도 높낮이와 굴곡이 있듯이 심한 오르막길 뒤에는 반드시 평평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몸뚱이만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사이로 통통하게 여문 가을햇빛이 걸쳐있다.
금봉곡 석굴암에서 불자 한 분이 가스통을 메고 세상 속으로 내려온다. 흰 고무신을 신고 가스통을 메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한다.
찌든 때 벗기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
밧줄을 잡고 암벽을 타고 1시간 정도 낙엽 속으로 들어가니, 돌무덤 위에 촛불이 깜박거린다.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세상을 밝혀 주는 저 촛불처럼 내 마음에 불을 밝힐 수 있다면…. 두 손을 합장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석굴암의 작은 암좌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마음의 고통을 훌훌 벗어 던지고 흐르는 계곡에서 손을 씻는다. 살 얼음물에 손을 씻는 것처럼 계곡의 물이 얼음장이다.
"공양하고 갑 써!"
나지막한 목소리로 팥죽을 권하는 석굴암 신도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돌계단에 주저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 한 그릇을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 팥죽 맛이 착착 달라붙는 그 맛, 언젠가 어머님께서 끓여 주시던 동지팥죽 생각이 났다.
스님의 목탁소리가 아흔 아홉 골 석굴암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그 위에 단풍잎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석굴암 뒤 곁에 앉아있는 아기 동자승이 낙엽 속에 묻혀있다.
마음이 조급해 질 때 떠나는 산행은 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 더욱이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깊은 산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내 마음속 찌든 때를 벗기고 다시 돌아오는 작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