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 해발 1600m,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온통 코발트색이다. 구름을 몰고 오는 오백장군도 어찌된 일인지 침묵을 지키는 가을 산. 한라산을 지키는 그 짙은 안개와 구름은 어디로 갔을까?
저만치 앞서가던 남편이 침묵을 깬다. "뭐 해! 뒤 좀 돌아다 봐 장관이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뒤를 돌아보는 남편은 가을 산의 지키는 산지기 같다. 바람이 땀을 닦아주니 그 시원함은 비길 데가 없다.
급경사로 놓여진 병풍 바위 앞을 쉬지 않고 올랐더니 숨이 헉헉거린다. 생수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심호흡을 하니 간장이 서늘하다. 정상을 가슴에 담고 산에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두고 온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 산행.
"누가 한라산에 불을 붙였을까?"
한라산은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붙은 산을 업고 있는 제주의 오름들. 어찌된 일인지 불길에 휩싸인 오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언제 보아도 고즈넉할 뿐.
가장 가까이 있는 오름의 분화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369개의 오름. 전설과 신화의 분화구. 산에 걸터앉아 산을 바라보니 보송보송 깔아 놓은 양탄자처럼 부드럽기만 하다.
오름을 업고 있는 가을산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 같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칭얼대면 젖을 물리셨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그래서 한라산을 두고 어머니의 산이라 했던가?
가을산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새통을 이룬다.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 신분의 차별이나 색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받아들이는 산. 그렇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뒤로 펼쳐진 삶의 터전인 오름을 보기보다는 앞을 바라보며 한라산의 봉우리만을 찾는다. 우리의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는 가장 꼭대기 봉우리를 찾듯이 말이다.
산의 정상에는 꼭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아 정상에 도전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망함. 그것은 어쩌면 마음 속의 정상이 아닐까?
하늘과 맛닿은 바다. 그리고 바다와 인접한 마을. 마을 속에 피어나는 높은 봉우리와 봉우리가 없는 제주의 오름.
한라산 1600고지에서 보는 풍경은 출발과 정상, 실상과 허상을 함께 간직한다.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