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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가족 식당 입구에서 그네들의 민속연주를 하고 있는 태가족사람
ⓒ 김정은
쓰저우를 완전히 벗어난 버스는 별다른 미련조차 남기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하이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중국에 남겨놓은 크고 작은 나의 흔적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질 것이고 내 기억 창고 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은 정리 안 된 기억의 편린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남겨질 것만 빼고 슬슬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슬슬 사라지는 기억들이 아쉽더라도 많이 담으면 담을수록 사라지는 기억만큼 남아 있는 기억도 많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더 많은 기억들을 머릿속에 담으리라 작정하고 어스름해진 상하이의 거리를 나섰다.

가장 먼저 태가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들러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며 그네들의 민속공연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네들의 기름진 음식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 동안 삼시 세끼 그네들의 음식을 먹다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것일까?

어느새 차 주전자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차를 따르고 그네들의 회전식탁을 익숙하게 돌리는 나를 보면서 역시 인간이란 굉장히 재빠르게 환경에 적응하는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동방명주 모습
ⓒ 김정은
동방명주와 와이탄

저녁을 서둘러 먹고 난 후 상하이 밤거리를 헤매다보니 저 멀리 상하이의 명물이라는 동방명주(東方明珠)가 높이 468m의 뾰족한 몸매를 자랑하고 서 있었다. 바로 옆에는 88층의 진마오빌딩[金茂大廈](480m)이 누가 더 잘났는지 뽐내고 있다.

우리네 63빌딩이나 남산타워의 야경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추측을 해보지만 그래도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방명주의 표를 끊어 꼭대기 전망대에 올랐다.

'94년 장쩌민이 상해시장 당시 이름을 직접 지었다는 동방명주는 일종의 TV송신탑이다. 동방명주에서 바라보는 황푸[黃浦]강의 야경이 멋있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63빌딩에 올랐을 때의 밍숭맹숭한 감정처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마 빅토리아 피크에서 때마침 내린 스콜로 온 몸이 젖은 채 바라본 홍콩의 야경이 짜릿한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서인지도 모른다. 비와 관련되어서일까?

역시나 이곳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애꿎은 초코 아이스콘 하나만 소비한 채 내려와 동방명주에서 본 황푸강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와이탄[外灘]으로 발길을 옮겼다.

▲ 와이탄의 야경
ⓒ 김정은
대부분 도시 야경이 모두 화려하지만 홍콩을 본 따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상하이 와이탄 지역 야경은 황푸강을 사이로 조명이 들어온 현대식 건물과 근대의 건축들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흡사 건축물 박람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특색 있는 야경을 보면서 문득 이곳이야말로 1900년대부터 외국의 조차지로 근대 문물이 태동했던 예전의 상업도시 상하이와 현재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 무역도시 상하이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처럼 상하이는 지금 꿈꾸고 있다. 더는 또 다른 퇴보란 있을 수 없다는 그네들의 의지를 대변해주듯 색색의 조명을 매단 각종 건물들은 화려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네들이 88층 빌딩과 동방명주를 상하이의 명물로 그토록 자랑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높이 높이 하늘로만 뻗어 오르는 고층 건물들이 그네들의 야심만만한 꿈과 자긍심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난징로의 중국어 간판

▲ 분명 낯익은 패스트푸드점인데 중국어 명칭을 써놓은 맥도날드, KFC 간판. 매우 이색적이다.
ⓒ 김정은
어느덧 와이탄을 빠져나와 상하이의 명동이라 흔히 말하는 난징[南京]로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거리 모습은 우리네 명동과 그리 다를 바 없으나 낯익은 패스트푸드점에 걸린 중국어 명칭 간판이 매우 이색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코카콜라가 먹어서 즐겁다는 可口可樂(커코우컬러)이 된 것만큼 그 뜻도 흥미롭다. 맥도날드(麥當勞), KFC(肯德基) 등 뜻도 재밌고 음도 재밌는 낯선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상점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영어 표기가 선명한 내 나라 간판들이 떠오른다.

중국인들은 맥도날드보다는 마이당라오[麥當勞], 이마트보다는 이마이더[易買得], 카르푸보다는 자러푸[家樂福]라고 말해야 잘 알아듣는다. 물론 그 이면에는 외국어 발음을 우리 한글처럼 비슷하게 표기하기 어려운 한자의 구조 탓도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그네들의 자존심은 유난해 보였다.

도대체 세계를 한 손에 주무르는 다국적 기업의 명칭을 모두 자기 식 대로 풀이해 놓은 중국인들의 겁 없는 자부심은 어디서 나온 걸까? 땅덩어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까?

▲ 난징로를 일주하는 꼬마열차의 표, 1인당 2위안이다.
ⓒ 김정은
문득 고개를 돌리니 난징로 일대를 다니는 관광용 꼬마열차를 만날 수 있었다. '상점들이 즐비한,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이 거리에 뭐 보여줄 게 있다고 이런 걸 만들었나'하는 궁금증을 풀고자 한 사람당 우리나라 돈으로 약 300원(2元) 정도 하는 꼬마열차요금을 내고 기차에 올라 난징로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또한 관광객을 유인하는 볼거리라 생각해 보니 구석구석 관광과 연결해 돈벌이를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상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중국을 떠나오면서 문득 중국인 토목기사와 서양인 토목기사를 비교 설명한 임어당의 터널 이야기가 떠오른다.

양쪽으로 정확히 계측하여 터널 하나를 뚫은 서구인 토목기사와 달리 계측이 정확하지 않은 탓에 터널 두 개를 파고 말았다는 중국인 터널기사 이야기 말이다.

터널 파는 시간이야 오래 걸리든 말든, 결과적으로 터널 두 개가 생기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중국인의 태연한 여유와 자부심은 3박 4일 동안 중국이란 넓은 땅덩어리에서 극히 일부의 중국과 중국인들을 만나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고 왔지만 문득 그네들에 비해 순진하고 티 없는 내 나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유만만한 중국과 비교해 뭔가 조급하고 불안해 보이는 내 나라에 대한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을 맴돌았다.

과연 우리나라는 장기적인 경기침체 터널에서 벗어나 가속이 붙은 중국호 열차에 함께 올라 탈 수 있을까? 2004년. 장강의 도도한 흐름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상하이의 모습, 바로 잠깐이나마 스치듯 목격한 2004년 중국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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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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