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김춘식씨는 목기와 제기 등을 만들어 전국에 유통하던 지리산자락 목물소산지(木物所産地) 남원에서 상을 고치던 유식씨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대바구니 공장을 하던 형님 집에 유식씨가 날마다 와서는 대나무를 주워 대못을 깎아 헌 상을 고쳤던 것이다. 그런 유식씨가 김춘식씨에게 나주에 가자고 제안했다.
사업에 실패한 형님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김춘식씨는, 당시 영산강 하구언을 막기 전이라 나주 영산포에 배가 드나들어 곡물과 해산물이 모이는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던 터라 그곳에 가서 유식씨와 같이 헌 상을 고쳐주면 살 길이 트일 것 같았던 것이다.
화폐개혁 전 당시 7000환을 형님에게 얻은 김춘식씨는 옷 한 벌과 신 한 켤레를 사 신고 유식씨와 함께 나주 영산포로 왔다. 그때 하나 있던 누님은 나주 남내동에서 결혼해 살고 있었는데 쌀 두 가마를 빌려서는 나주 동수리 사촌 매형의 주선을 받아 방을 하나 얻어 그곳에서 유식씨와 함께 살게 된다.
추운 겨울이라 땔감도 없었는데 유식씨는 주인집 헌 상부터 공짜로 수리해 주자고 제안했고 헌 상을 잘 고쳐주자 그 마을에 소문이 퍼져 한 달 20일만에 영산포 시장으로 나와서 살게 될 만큼 큰돈을 거머쥐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헌 상을 고쳐주면 쌀 3되를 받았는데 그것은 대단히 높은 가격이었던 것이다.
영산포로 나온 김춘식씨는 대담하게 이제 상 공장을 차려 새 상을 짜서 팔기로 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새 상을 만들어 놓아도 판매할 길이 없어 결국 망하고 말았다. 그때 유식씨를 남원으로 보내려고 형님이 남겨둔 영산포 점포 자리 2개를 팔아 옷 한 벌에 신 한 켤레 사서 주고 나머지를 여비로 주었다고 한다.
혼자 남은 김춘식씨는 나주 석연리 누나 집으로 가서 사돈 주선으로 헌 상을 고쳐주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마을 저 마을로 불려가 사랑방 거처를 하며 그곳에서 헌 상을 고쳐주는 사람이 되었다.
헌 상 고치는 총각으로 살아가던 27세 때 싸전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영산포에 살던 26세 이상순씨와 맞선을 보게 된다. 그때 가진 게 없었던 김춘식씨는 장가는 무슨 장가냐고 선을 보러 가는 장소에 작업복 차림으로 갔는데 서로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김춘식씨는 영산포 시장에서 지게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던 김진용씨 도움으로 장계 총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 장계는 빚을 내주고 이자를 받는 돈놀이였던 것이다. 이듬해 김춘식씨는 일약 벼 200석을 움켜쥐게 되었다. 그러나 김진용씨와 함께 사과장사에 손을 대 거의 잃게 되었고 손을 뗀 후 광주상집을 운영하며 본격적으로 상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우리나라 상은 영남의 통영반, 호남의 나주반, 서울이북 해주반으로 이 세 곳이 전통적으로 유명했다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후 차차 그 맥을 잃게 되고 말았는데 60년대 당시 서울에서 나주반을 사러 손님이 오면 거치고 거쳐서 결국 김춘식씨에게 오더라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상도 잘 모르는 햇병아리인데 참으로 난감했다. 1964-65년에 본격적으로 나주반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전남 장성, 나주 문평 등지에서 나주반의 잔재를 찾아내 그 모형을 복원하게 되었다.
나주반은 장식이 없고 실용적인 게 특징이다. 통영반, 해주반이 직각으로 곧게 서있는 반면 나주반은 다리가 엇 벌어져 있고 밥그릇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상 모서리도 둘레가 빙 둘러져 더 높게 막혀 있다.
상판은 은행나무, 다리는 소나무나 버드나무, 옻칠과 황칠을 사용하여 만드는 나주반은 4각, 12각, 호족, 개다리, 단각반이 등이 있는데 다른 상에 비해 그만큼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70년대 종업원 20명을 두고 영산포에서 광주상집을 운영했던 김춘식씨는 1977년 2월 광주에서 나주반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자신의 보물 1호로 60-70개의 나주반 여러 모형을 복원해 놓았던 것을 내놓았다.
당시 완도에는 미역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아낙들이 모여 미역일을 했다. 비가 오거나 쉬는 날은 몸을 팔기도 했는데 이들을 미역순이라고 했단다. 이 미역순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기금을 조성하려고 당시 천주교 로마노 신부가 김춘식씨의 나주반을 기증하라 하였고 그 전시회를 했던 것이다. 사라진 나주반이 되살아났다고 서울의 중앙방송에서 취재가 오고 여기저기 대서특필되었다고 한다.
사실 나주반에 대한 기록은 일제시대 아시카와 다쿠미의 노력이 크다고 한다. 일본인 아시카와 다쿠미는 당시 나주반의 특이한 점을 알아보았고 그 기록을 위해 아버지가 죽었어도 일본에 가지 않고 ‘조선소반과 도자문고’라는 논문을 훗날 완성해 아버지 무덤에 가서 바쳤다고 한다. 아시카와 다쿠미의 묘는 현재 경기도에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아 폐묘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미치지 않으면 이 일 못합니다. 천공개물(天工開物)이라고 하늘에서 뜻을 내어 좋은 인재를 만드는 것이지요.”
장인정신과 그 장인을 받드는 세상의 풍토를 강조하는 김춘식씨는 옛날 스승들은 제자가 상을 만들어 오면, 칠하기 전이라 그것을 백골이라고 하는데 그 백골을 문밖으로 홱 내던졌다고 한다. 다리가 부러지면 풀칠하고 못 박아 쓸 수 있는데 이음새가 빠져서 덜렁거리면 그대로 밟아서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엄격하게 장인을 길렀던 것이다.
나주반의 원형을 복원하려 가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자녀들 학비를 제때 한번도 준 적이 없는데다가 빚에 빠져 어렵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김춘식씨는 이 땅에서 뜻 있는 일 하나 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나주반의 전통은 이제 김춘식씨의 막내아들 김영민씨가 대를 이어 그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항상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김춘식씨는 보리고개에 청맥(靑麥)을 해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면서 못 먹고 못 살고 힘든 때가 언제인데 우리가 이렇게 흥청거리며 가진 자, 배운 자는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좌식문화, 밥상문화의 좋은 예법과 전통을 다 잃어버렸다고 현 세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입만 열면 민족을, 민주를, 학문을, 문학을, 예술을, 온갖 것을 빙자해 돈과 지위와 권력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 시대에 자신이 대패질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없는 정진을 주장하는 김춘식씨는 ‘돈을 벌려거든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 돈을 많이 벌어라’고 말한다고 했다.
예술 작품, 상품 하나 어영부영 만들어 놓고 분에 넘치는 돈과 지위와 권력을 누리며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위세부리고 뻐기면서 제 작품에 저 혼자 반해 기고만장하는 그런 한심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참으로 요긴한 말이 아닌가 싶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일하는데 투자하고 있는 김춘식씨는 나주반과 전통 장롱을 주문받아 전통 기법 그대로 제작해 주기도 한다.
앞으로도 나주반을 계속 하겠냐는 질문에 ‘그것은 내가 답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답할 일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 나라 사람들이 제 나라의 우수성과 전통을 알아보지 못하고 서양의 문물과 서양식 사고에 젖어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치는 얼빠진 세상을 향해 던지는 따가운 질책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