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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이후 10여 년 동안 표류해온 농업협동중앙회(농협)에 대한 개혁이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7월 농협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하는 이른바 '농협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은 상태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네 차례에 걸쳐 농협 개혁을 위한 핵심과 문제점, 대안 등을 집중 점검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는 두번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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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건물. 농협중앙회장은 문민정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횡령과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되는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건물. 농협중앙회장은 문민정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횡령과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되는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농협은 자체가 파워다. 전국 각지에 조직이 있어서 농협이 힘이 센지, 내가 힘이 센지 아직 모르겠다."

지난 2003년 2월 4일, 대통령 당선 뒤 전국 순회 토론회를 가진 노무현 대통령은 춘천 한림정보대학에서 열린 강원지역 대토론회에서 농협을 두고 "그 자체가 파워"라고 말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강원지역 농민단체 회원으로부터 "농협이 기관화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이처럼 솔직한(?) 답변을 내놨다.

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현재의 농협은 설사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막강한 조직이다. 전국 1327개 지역·품목조합과 16개 지역본부·중앙회, 총 6만7700여명에 이르는 직원, 올해 운용중인 신용자금만 해도 267조원…. 규모나 자금력으로 볼 때 농협은 국내 어느 재벌, 어느 은행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처럼 거대하기 때문일까. 그동안 몇 번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협에 칼을 들이댔지만, 제대로 된 개혁은 단 한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무능한 정치권 탓도 있었지만, 농협 내부의 저항이 워낙 거셌다는게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전농 관계자는 "이 때문에 농민들은 농협을 '농협 마피아'라 부른다"고 전했다.

농협중앙회의 집요한 저항과 로비

실제 농협 개혁은 이미 지난 94년 문민정부와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정치권에 의해 두차례나 시도된 바 있다. 94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농어촌발전위원회'를 두고 ▲협동조합 민주화와 경영의 효율화 ▲품목별·축종별 전문조합 육성 ▲중앙회의 신용사업·경제사업 분리 ▲협동조합간 협동 등 4대 중점 개혁과제를 추진했다.

하지만 의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농어촌발전위원회의 농협 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협동조합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농협중앙회장은 여전히 농협직원 출신이 차지했고, 기득권을 가진 농협중앙회는 행여 밥그릇 뺏길 새라 품목별·축종별 전문조합 설립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현재까지도 농협 개혁의 핵심으로 불리는 신용사업(협동조합은행)과 경제사업의 분리 역시 유야무야됐다.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이사장 황민영)가 펴낸 책 <농민과 함께하는 농협만들기>(장종익 저)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하여 경제사업을 연합회 조직으로 전환하고 신용사업은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은 중앙회의 집요한 저항과 로비에 의하여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되고만 '협동조합발전기획단' 설치로 귀결되고 독립사업부제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104 페이지)

이같은 사정은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도 반복됐다. 국민의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출범 당시 농협 개혁을 '국정 100대 과제'로 선정할 만큼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앞선 문민정부의 '농어촌발전위원회'와 같이, 국민의 정부도 '협동조합개혁위원회'를 구성해 조직 수술에 나섰으나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개혁위원회의 구성에 정부, 중앙회 등을 포함시킴으로 인해 깊이 있는 검토보다는 조직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또한 장관의 자문기구임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을 4명씩이나 참여시킨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 실제로 개혁위원회 산하 실무기획단에서는 공무원과 중앙회 실무자가 참여하면서 깊이 있는 분석과 토론을 기피하고, 중앙회는 보유하고 있는 자료의 제출도 꺼리는 분위기였다."(앞의 책, 108 페이지)

이같은 '개혁 실패의 역사'를 살펴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왜 농협을 두고 "그 자체가 파워"라고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노 대통령이 "누가 힘이 센지 모르겠다"고 자조한 것도 앞선 두 정권이 가진 실패의 교훈 때문이었다.

역대 농협중앙회장 줄줄이 구속 '진기록'

농협의 역사 속에는, 왜 지금 시급한 개혁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문민정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협중앙회장은 횡령과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줄줄이 구속됐다. 현임 정대근 중앙회장 직전까지 직선 출신의 농·축·임협중앙회장들은 하나같이 구속된 경력을 갖고 있다.

문민정부 초반인 지난 1994년 3월 19일에는 한호선 전 농협중앙회장이 구속 기소됐다. 한 전 회장은 농협 예산을 전용해 4억80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 이 중 4억1000만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를 받았다.

한 전 회장의 구속 기소 전에는 명의식 전 축협회장이 9억4000여만원에 이르는 공금을 횡령하고 인사청탁을 한 이유로 구속됐다. 또 이보다 앞서 1990년 4월에는 홍종문 전 수협회장이 선거과정에서 단위조합장들에게 금품을 뿌린 혐의로 구속됐다.

한 전 회장 구속 당시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당시 대검 중수부장)이 이끌던 검찰 수사단은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은 외면한 채 신용사업만 치중하고 있는 농협을 개혁해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수사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농협중앙회의 고질병은 끊이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초반인 1999년 5월, 원철희 전 농협중앙회장(전직 국회의원)이 6억원의 업무추진비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수사 결과, 원 전 회장은 이렇게 조성된 비자금으로 전임 농협중앙회장이면서 자민련 후보로 99년 강원지사 지자체 선거에 출마한 한호선씨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찰은 농협중앙회 임직원들이 직접 선거 현장에 뛰어들어 한 전 회장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고도 밝혔다. 농협중앙회의 현 회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는 전임 회장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농협중앙회 임직원들은 전임 회장의 당선을 위해 운동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사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원 전 회장의 구속 기소가 발표되던 날, 이명재 대검 중수부장(전 검찰총장)은 전국 농·축·임·수·인삼협 비리에 대한 일제수사 결과도 함께 발표하며 모두 287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국내 협동조합이 공안사건이 아닌 단일 사건 규모로는 사상 최대 인원의 구속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던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3월에는 서울지검 특수1부가 부도직전의 한보철강에 무려 680억을 불법대출 해준 혐의로 전 농협 선릉지점장 등 관련자 12명을 구속한 사건도 있었다.

농협, 어두운 과거 벗을 용기 없나

이와 같은 개인 비리나 권력형 비리의 잔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열린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은 농협의 '썬앤문 불법 대출 사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참여정부 역시 농협과 관련된 비리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셈이다.

물론 이 같은 사건이 농협을 굴복시키고 정권의 '사금고'로 이용하려는 역대 정권의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농협 내부의 반발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농협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농협의 구조적 모순이 비리로 얼룩진 과거를 만들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농협이 보다 투명하게 운영되고, 농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면 감히 어떻게 역대 정권이 마음껏 흔들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황민영 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은 "농협중앙회장이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정권에 봉사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며 "이번에도 농협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같은 역사는 되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대 회장이 줄줄이 구속된 것은, 정권의 탓보다 농협의 탓이 더 크다"고 말했다.

농협이 변해야 농민이 산다는 지적이 나온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농협은 덩치만 커졌을 뿐 "지금처럼만!"을 외치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 비판이 터져 나올라치면 농협 직원들은 "왜 힘없는 우리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항의하기 바쁘다.

농협이 진정한 농민의 대변기구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내부의 반성부터가 절실한 형편이다. 농협과 농협 직원들은, 과연 어두운 과거를 벗어 던질 용기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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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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