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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건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건물 ⓒ 오마이뉴스 남소연
"농정사 50년만에 협동조합이 농업인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지난 1999년 9월, 각 신문사에는 농림부가 내보낸 위와 같은 문구의 광고가 실렸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IMF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 시류에 맞춰 축협을 농협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구범 전 축협중앙회장이 국회에서 '할복' 자해를 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하고, 끝내는 축협이 헌법소원까지 제출했지만 통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축협을 농협에 통합시키면서 농림부가 선전한 내용이 바로 "협동조합이 농업인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광고였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농협이 과연 농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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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 농·축협의 통합이 온당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다만, 결과만을 놓고 볼 때 1999년과 2000년 농·축협의 통합은 농협중앙회의 '비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농협은 전국 각지의 축협 점포를 흡수, 통합했고 현재의 '공룡 조직'도 탄생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커질 대로 커진 농협 조직을 효율적으로 바꾸고 국민의 정부 구호처럼 농협을 농민에게 돌려줄 수 있는 방안은 어떤 것일까.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지난 10년간 실패해 온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신·경분리)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정대근 회장 "신·경분리 관건은 농업인의 이익"

우리나라 농협은 '종합농협'의 형태다. 종합농협이란 금융업무를 뜻하는 신용사업과 유통·농정·지도사업이 포함된 경제사업을 농협중앙회가 모두 취급하고 있다는 의미다.

농협 개혁을 외치는 농민단체와 외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농협 내부에서는 섣부른 신·경분리가 오히려 농협을 망치고 도리어 농촌에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예측이 강하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현재의 농협은 마치 '샴쌍둥이'와 같다. 신용사업을 담당한 조직과 경제사업을 담당한 조직이 '한몸'으로 연결돼 있는 상태인 것이다.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는 이런 '샴쌍둥이'를 그대로 둬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분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처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신용·경제 분리는 농협과 합의하지 않은 농림부의 장기구상이다. 신·경 분리의 관건은 농업인과 지역농협의 이익 여부 및 이를 위한 자본금과 지도사업비 조달 여부에 있다. 이런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분리는 어렵다."

지난 5월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 회장의 이 같은 말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농협 개혁'의 핵심인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를 바라보는 농협 내부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지난 1994년 문민정부의 농협 개혁 때부터 등장했다. 하지만 신·경분리를 포함, 당시에 마련한 농협 개혁의 '4대 방안'은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경분리는 농협 개혁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지만, 이마저도 이뤄지지 못했다.

농협중앙회와 농림부 등이 지금껏 신·경분리를 반대해 온 논리는 명확하다. 신·경분리가 농민들에게 가져올 결과, 즉 득실이 어떠한지에 대한 '손익계산' 연구가 제대로 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 당시 농민단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취임한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농협 개혁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99년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통합문제는 분리·통합에 따른 손익계산서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는 두 사업의 분리가 농협은 물론, 농민들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현재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그나마 신용사업에서 이익을 보고 경제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할 경우 두 사업 모두가 어려워져 도리어 농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내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샴쌍둥이'를 무리하게 수술했을 경우, 둘 다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는 농협중앙회와 농림부도 '신·경분리'에 무조건 반대하는 상황은 아니다. 지난 7월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농협개혁안'에 따르면, 농협중앙회는 1년 이내에 신·경분리 계획을 세워 정부에 제출하도록 돼 있다.

농협중앙회는 신·경분리가 이뤄지기 위해서 일정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즉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에 따라 필요한 자기자본비율(BIS) 확충금과 지도사업의 독립을 위한 비용 마련 계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재원 마련이 바로 정대근 중앙회장이 지난 5월 인터뷰에서 언급한 '조건'이다.

농협중앙회는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한 자금은 최소 3조6000억원(2003년 6월 보고서 기준), 지도사업비는 200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예상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수년 정도의 유예 기간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농협의 '자발적 개혁의지' 못 믿는 전문가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과 국회의원들 및 전농 등 농민단체, 협동조합 전문가들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신·경분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이를 위해 농협개혁안에 '최대 2년 이내' 등 신·경분리 시한을 못박고, 이에 따른 강제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의원들과 전문가들이 이처럼 신·경분리를 요구하는 이유도 따로 있다. 현재의 농협중앙회가 돈 안 되는 경제사업은 외면한채 돈놀이로 자신들의 배만 불려가고,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이 신·경분리를 서두르는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다. 이는 무엇보다 '실패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각각 정권 초기 '신·경분리'를 개혁의 목표로 삼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무엇보다 농협중앙회의 자발적인 의지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달 열린 국감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조속한 신·경분리를 요구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부 법안에는 농협중앙회가 1년 이내에 분리안을 제출하도록 돼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신·경분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1년 내에 계획을 제출하는 것은 앞으로 10년, 20년간 계획만 세워놓겠다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협을 연구해 온 황민영(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도 "신·경분리에 대한 시한을 못박지 않는다면 개혁은 헛구호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농협중앙회가 자기자본비율(BIS) 확충이나 지도사업비 마련 등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경분리를 방해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참여정부가 '한·칠레 FTA'에 대비하기 위해 이미 119조원을 농어촌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이 외에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데도 핑계만 대고 있다는 것이다.

강 의원은 "농협중앙회가 BIS를 맞추기 위해 처음에는 3조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5조원, 8조원 등 갈수록 액수를 늘리고 있다"며 "이는 어떤 이유를 대든지 간에 신·경분리를 안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또 해마다 늘어가는 경제사업의 적자율을 신·경분리의 반대 이유로 내세우는데 대해서도 반박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신·경분리가 이뤄진 뒤 경제사업을 품목별·축종별 협동조합연합회로 전환한다면, 경제사업에서도 얼마든지 흑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문가들은 농협중앙회가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의 경제사업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이를 볼모로 '돈 되는' 신용사업을 유지하겠다는 흑심을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

농협 개혁은 결국 농협의 몫

지난 7월 농협개혁법안이 국회에 제출되면서 현재 공은 국회로 넘어와 있다. 현재 각 당은 신·경분리를 포함한 농협개혁법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농협개혁안이 국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뀌더라도, 최종적인 집행과 노력은 농협중앙회의 몫이다. 과거 10년간 줄기차게 지적돼 온 대로 명실상부한 신·경분리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지 농민과 국민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지난 10년 사이 세번째 찾아온 '개혁의 기회', 과연 농협은 과거 국민의 정부 구호처럼 농업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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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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