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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전지는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버리든가 화물로 다시 부치세요."

작년 이맘 때쯤 필리핀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심사를 하던 중 휴대용 가방 속에 들어 있던 건전지 묶음이 출입국 검색대에서 보기 좋게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건전지 10개가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다시 화물로 부쳤다. 짐을 부치지 않고 간편하게 출국하려던 간편함이 고작 건전지 몇 개로 인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럼 휴대용 가방에 들어 있던 건전지의 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디지털 카메라(이하 디카) 전원 공급에 사용하는 건전지였다. 이것은 건전지 가격이 비싼 현지에서는 건전지가 다 떨어지면 디카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진 귀한 물품이었던 것이다.

디카는 건전지 잡아 먹는 귀신

디카를 써 본 사람이라면 디카가 '건전지 잡아 먹는 귀신'이라는 것은 잘 알 것이다. 특히 여러 컷의 사진을 촬영할 때는 충전식 배터리도 금방 닳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 탓에 디카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어떤 전원 공급 유형의 디카를 사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디카에는 충전이 가능한 리튬 이온전지를 사용하는 기종과 충전식 니켈수소전지(AA형)와 알카라인 건전지를 병행해서 사용하는 기종이 있다. 그러나 디카의 배터리 방식은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리튬 이온 전지를 사용하는 기종은 배터리가 오래 가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밖에서 전원이 나가면 충전된 예비 배터리가 있지 않는 이상 급하게 다른 전원 시스템으로 대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충전식 니켈 수소 전지류(AA형)는 외부에서 전원이 나가더라도 알카라인 건전지를 구입, 사용할 수 있어 대체하기 쉽다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알카라인 배터리는 지속 시간이 짧고 충전식 니켈 수소 전지 또한 사용을 거듭할수록 메모리 효과로 인해 충전 효과가 떨어진다. 결국 배터리에 만만치 않은 돈을 쓰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이밖에도 제조사나 기종마다 배터리 소비량이 다르기 때문에 알카라인 건전지를 사용하는 모델이라 해도 기종과 제조사에 따라 금세 소비되어 버리거나 작동이 아예 안되는 모델도 있다. 이런 사실만 봐도 배터리 방식이 디카 구입시 무시할 수 없는 선택 기준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범용성이 있는 AA 배터리 사용이 가능한 기종을 선택했기 때문에 귀찮은 충전식 배터리 대신 급할 때는 알카라인 건전지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여행갈 때는 의례 알카라인 건전지 몇 묶음을 옵션으로 챙겼다. 전압이 다른 외국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 충전기는 놔두고 한국산 건전지를 몇 묶음씩 잔뜩 사가지고 나가다 보니 검색대에서 마치 위험물을 지닌 위험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었다.

디카의 건전지에 대한 '안좋은' 기억은 최근 중국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생겼다.

3박 4일간 중국 여행에서 디카 촬영에 충분할 만큼의 배터리는 당연히 챙겨왔다. 문제는 건전지 챙기는 걸 깜박하고 호텔에 놔 둔 짐 속에 고이 모셔둔 채 길을 나선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후였다. 일단 사진은 찍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눈에 띄는 중국산 건전지를 사서 디카에 장착하고 전원을 켠 다음 LCD 화면을 켜고 셔터를 누르려 했다.

그런데 왠일인가? 분명 새로 교체한 건전지였는데 액정이 꺼지면서 배터리 부족 경고 문구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한국산 알카라인 건전지는 2개만 넣으면 부족한 대로 비교적 꽤 촬영할 수 있었는데 똑같은 알카라인 건전지인데도 중국산은 왜 그럴까, 전압이 낮은 탓인가? 용량이 작은 탓인가? 이런 저런 걸 생각하기엔 발 등의 불이 너무 급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LCD를 꺼 놓고 뷰파인더만 보면서 그럭저럭 촬영했지만 생각만큼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다.

디지털의 대표아이콘, 디카의 아킬레스건은?

배터리 때문에 이런 저런 일을 겪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성능 좋은 디카라고 해도 그 조그만 배터리가 떨어지면 다시 채워 넣지 않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마니,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배터리야말로 가장 막강한 디카의 천적이자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아무리 디카가 디지털 이미지를 생산하는 디지털 세상의 대표 아이콘이라고 해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건전지 몇 알이 없으면 꿈쩍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마는 흥미로운 관계였다. 이처럼 디카와 배터리의 흥미로운 상관 관계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칼라하리 사막에 떨어진 콜라병과 부시맨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콜라병은 그 용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부시맨 부족에 의해 방망이나 악기, 그릇 등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배터리가 떨어진 디카가 만약 이 부시맨들에게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방망이로도 못 쓸 테고 악기도 못 쓸 테고 고작 아이들의 장난감 정도로나 사용될까? 아니면 쓸모없이 방치되어 모래 속을 이리저리 나뒹굴지도 모른다. 결국 배터리 없는 디카는 결국 빈 콜라병보다 못한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담보한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을 담보한다. 아무리 손오공이 벗어나려고 애써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듯 디지털 없는 아날로그는 존재할 수 있지만 아날로그 없는 디지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디지털 세상에서도 아날로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비록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형 물건들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촌스럽다며 놀림 받고 이리 저리 천대 받더라도 기능상으로는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다. 반면, 디지털형 물건은 그것을 작동시키는 또 다른 아날로그형 물건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 마치 전기가 없는 아마존 오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컴퓨터니 휴대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말이다.

볼품 없는 작은 건전지지만 그 하나가 디지털 세상으로 진입하느냐 못하느냐의 중대한 열쇠인 것처럼 디지털 세상에서도 아날로그는 여전히 유용하고 소중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와 인간 공간을 연결하는 것도 매우 아날로그적인 '구식 전화기'라는 사실에서도, 디카의 LCD의 이미지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따스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디지털 세상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디지털에게 보다 아날로그적일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지닌 휴먼 로봇이나 사이보그, 내지는 컴퓨터의 등장을 상상하듯이 말이다.

보다 아날로그적 체취가 묻어나는 디지털 세상

디카 배터리로 인해 시작된 나의 상상은 이쯤에서 끝났다. 배터리는 디지털 카메라의 아킬레스건이지만 디지털 카메라와 배터리가 잘 조화하면 멋진 디지털 이미지가 되듯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조화롭게 적재적소에서 운용되는 세상이야말로 바람직한 디지털 세상이 아닐까?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외국으로 나갈 때 더 이상 건전지 다발 때문에 짐을 부쳐야 하는 번거로움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해 중순부터 인천공항 관세구역에서 건전지를 판매하게 됨에 따라 건전지를 통채로 휴대용 가방에 넣고 출입국 검색대를 통과하더라도 문제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디카용 건전지 때문에 그동안 겪었던 여러가지 해프닝은 이제 사라지는 건가?

물론 중국산 건전지의 미스터리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고 또 언제 어디서 또 다시 건전지를 잃어 버리거나 휴대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때문에 디카와 배터리에 관한 나의 황당한 추억은 이후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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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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