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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격이 안 맞을 것 같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얘기해 볼까 합니다.

거대 폭력 조직의 보스가 있습니다. 그 바닥에서 가장 힘이 센 조직으로 다른 조폭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부터 신경을 건드리던 어느 먼 동네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조폭 하나가 덤벼 듭니다. 한 번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해오던 조직원 한 명이 오더니 자신의 형제라며 봐 달라고 빕니다. 이 보스는 시간을 주겠으니 가서 잘 타일러 보라고 말합니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대충 감은 잡으셨을 겁니다. 그러면 노무현 정부 출범 뒤 세번째였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어떤 배경에서 열렸을까?

제가 쓴 이전 글에서는 부시가 '추가 조치'류의 강경책을 들고 나올 가능성을 염려했는데 일단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노 대통령이 북·미 핵 문제와 관련해 외교부 관료들이 걱정할 정도로 상당히 솔직하게 우리의 의사를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NSC 참모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다소 엇갈리는데 이제까지 큰 흐름에서 보면 할 말을 했다는 반응들입니다.

"글로벌 이슈 미국에 협력... 한반도 이슈는 한국 의사 존중을"

"대통령의 'LA 발언'은, 돌출적인 것이 아니고 준비한 작품이다."

최근 만난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3차 6자 회담 때와 비슷한 기류를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02년 10월 17일 핵 문제가 불거진 뒤 지금까지 미국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고 노력해왔는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강한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APEC에 참석하기 위해 노 대통령이 출국하기에 앞서 NSC의 이종석 사무차장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국무부의 월포위츠 부장관을 면담한 이 차장은 미 NSC의 해들리 부보좌관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의사를 분명히 전했습니다.

당국자 A : "'재선을 축하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2기에는, 뭔가 잘 만들어 보자. 우리 대통령은 3년, 부시 대통령은 4년 임기가 남았다. 사실상 임기를 같이 하는 것이다. 핵 문제가 터지고 2년 동안 미국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런데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핵 능력도 없다고 했던 북한이, 이제는 핵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수준이 됐다. 우리로서는 할만큼 했고, 이제는 우리가 나서겠다. 글로벌 이슈는 미국에 적극 협력하겠다. 한반도 이슈는 우리 의사를 존중해 달라. 리비아 핵 문제는 8개월 만에 해결했고 이란 문제도 잘 되고 있다. 왜 북한만 잘 안되느냐. 이제는 우리가 나서겠다.' 이것이 이 차장이 전한 내용이다."

이 자리에서 이 차장은, 대통령의 'LA 발언'이 있을 것이며, 그 연설을 주의해서 들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들리 부보좌관은 한국의 생각을 충분히 알겠으며 부시 대통령에게 자세하게 보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약속 안 지킨 것 많아... 우리에게도 발언권 있어"

이와 관련한 또다른 당국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당국자 B : "정상회담 전과 회담을 보면, 우리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다. 지난 2년간 미국이 해 달라는 것 다 해줬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기지 이전. 그런데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많다. 지난해 APEC에서 말한 다자안전보장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고, 3차 6자 회담에서 구체적인 미국의 방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발언권이 있다."

노 대통령과 우리 정부의 이같은 기류는, 이미 지난 10월에 미국에도 전달됐다고 한 당국자는 덧붙였습니다. 10월 13일 미 NSC의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인 마이클 그린이 한국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 또 파월 국무장관의 방한에서도 우리 생각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실제 어떤 내용이 오갔을까? 회담이 37분 정도 진행된 것에 비춰보면 큰 틀의 의견만 교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40분 잡아도 두 정상이 실제로 말한 시간은 통역을 고려하면 10분 정도.

노 대통령이 부시에게 직접 결단을 촉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진지한 협상을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제까지 미국이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양보, 선 핵 포기만을 요구하며 협상에 나서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이제는 협상하자는 것입니다.

"정상회담에서 '결단', '주도적 역할' 거론 안 해"

당국자 A : "정상회담에서 '결단', '주도적 역할' 같은 말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의지는 충분히 전달했다."

이에 대한 부시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히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는 것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나온 얘기들입니다.

당국자 A : "부시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치열한 접전을 예상했던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고 또 우리는 이라크 파병을 했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 얘기를 잘 들었다. 'I agree', 'Absolutely' 같은 수준의 표현이 아니고, 적극적인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대통령이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말자고 하자 'You've got a deal'이라고도 했다. 기본적으로 부시는 정치인이다. 우리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꺼내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빨리 이해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미 핵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어려움을 거론한 노 대통령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앞으로의 한·미 조율은? 설령 부시가 기분이 좋았고, 한국 대통령의 처지를 이해했고, 그래서 두 정상이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한다"고 합의했지만 그것이 과연 미국의 대북 정책의 변화를 가져올까?

"협상으로 문제 풀어야... 필요하면 미국과도 논쟁하겠다"

당국자 A : "앞으로는, 대화를 통해 협상을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미국이, 대화는 하지만 협상은 없다고 하지만,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필요하면 미국과 논쟁도 할 것이다. 'negotiation'(협상)을 입에 달고 다닐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뭐냐. 협상이다. 미국이 생각하는 평화적, 외교적 방법이 우리와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생각은 확고하다. 대통령은 봉쇄도 안 된다고 했다. 10월에 그린은 방한해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면 전면적인 검토는 아니지만 대북 정책을 리뷰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차장 방미, 한·미 정상회담을 그같은 리뷰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당국자 B :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북한과 진지하게 협상을 하라는 것이다. 협상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이 모여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회담의 의미는 이제는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핵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 부시도 합의했으니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네오콘 등 미국 강경파가 가만히 있을까? 그들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불신하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 체제를 전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네오콘 위세 이어지지 않을 것... 라이스가 더 나을 수도"

당국자 A : "우리에게 라이스가 국무장관이 된 것이 나쁘지 않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파월보다 나을 수 있다. 우리가 미 국무부와 합의한 사항도 미 행정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누더기가 된 일이 많았다. 그런데 라이스는 힘 있는 장관이다. 우리로서는 실세와 직접 얘기하고 설득할 수 있게 됐다. 부시는 이번 선거에서 체니나 월포위츠에게 빚진 것이 없다. 네오콘이 꼭 득세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월포위츠는 현 자리에 있을 것이다. 볼튼도 마찬가지다. 월포위츠나 볼튼이 장관을 하려면 청문회를 해야 하는데, 부시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해들리는 네오콘으로 쉽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라이스 라인으로 볼 수 있다."

당국자 B : "네오콘의 위세가 꺾였는지는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부시 1기만은 못 하다고 본다. 라이스가 국무가 됐고. 우리로서는 파월 때보다 나을 것이다. 해들리도 네오콘이고 라이스보다 깐깐하기는 하지만, 라이스와 가까운 사람으로 봐야 한다. 앞으로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국무부 부장관에 누가 오느냐다. 캔터가 오느냐, 볼튼이 오느냐를 잘 봐야 한다. 정통 보수주의자는 대화는 된다. 네오콘은 얘기조차 안된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미 핵 문제의 장기화가 심각히 우려되는 상황에서 부시의 재선이 자칫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본 노 대통령은, 부시에게 직간접적인 메시지를 보내 한국의 생각을 솔직하게 전했습니다.

그에 대해 부시는, 1차적으로는 이해한다, 평화적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수사에는 동의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부시의 합의를 고리로 해서, 미국측에 북한과의 대화만이 아닌 본격적인 협상을 요구해 핵 문제를 풀겠다는 전략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 과정에서 필요하면 미국측과의 논쟁도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이와 함께 일부에서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과 특사 방북은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미국에 대북 강경책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만큼 좀더 지켜보면서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대신 현 시점에서는 장관급 회담 등 남북 관계를 복원하면서 핵 문제 해결을 설득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의 이같은 전략에 대해서는 타당성, 적실성, 현실성 측면에서 많은 비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같은 비판이 핵 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의 정상화 그리고 남북 관계의 눈부신 진전과 동북아에서 냉전 구조 해체하고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파성은 당연히 배격해야 하며, 지나치게 완고한 원리주의 역시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외교부 "플랜 B를 미국에 가져가야 설득력 있어"

최근 들은 에피소드를 덤으로 전해 드립니다. NSC 이종석 사무차장이 미국에 가기에 앞서 외교부가 중요한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플랜 B'와 관련한 내용인데 이 차장에게 미국에 갈 때, 대북 강경책을 담은 '플랜 B'를 가져가서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내용으로 하느 '플랜 A'만 얘기하는 것보다는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별로 우리도 '플랜 B'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하는 것이 '플랜 A'를 미국에 설득하기에 좋다는 논리였습니다.

외교부의 이런 주장에 이 차장도 상당히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NSC의 이종석 차장이 '플랜 B'를 미국에 설명하는 순간 '플랜 A'는 없어지게 된다는 우려가 나왔고 결국 '플랜 B'는 준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외교부, 참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인지." 정부 당국자의 씁쓰레한 설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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