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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살아 낸 상식적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국가와 인권은 상극의 개념이었다. 국가는 반공과 개발의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인권에 유보·단서 조항을 달았고 인권을 적대시했다. 그래서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름부터 형용모순의 조합어인 듯했고 공룡과 아메바를 한 몸에 지닌 괴물 같기도 했으며 '회개한 국가'임을 선포하는 국가 측의 기획 상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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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 국가인권위 출범 3주년, 1096일의 발자취

지난해 11월,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의 첫 대목이다. 기사에서 표현하듯 국가인권위는 과연 '형용모순'일까? 그것은 오로지 국가인권위의 활동 결과에 따라 내려질 수 있는 판단이다. 그런 면에서 국가인권위 3년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일은 국가인권위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확인이며 우리 사회의 인권 현장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랑비에 속옷 젖듯' 관행 개선

올해 10월 31일 현재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총 진정사건은 1만2176건이다. 이중 인권 침해 사건은 1만11건(82.2%)이고, 기타 사건은 1288건(10.6%), 차별행위는 877건(7.2%)이다. 인권 침해 사건을 유형별로 보면 구금시설이 4420건(44.2%)으로 가장 많고, 경찰 2117건(21.2%), 기타 국가기관 1935건(19.3%), 검찰 610건(6.1%) 등이다.

구금시설은 국가인권위 출범 직전까지도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구금시설의 관행과 문화는 '가랑비에 속옷 젖듯' 변화해 왔다.
구금시설은 국가인권위 출범 직전까지도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구금시설의 관행과 문화는 '가랑비에 속옷 젖듯' 변화해 왔다. ⓒ 인권위 김윤섭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인권 피해자들이 특히 국가인권위의 존재를 체감할 수 있었던 곳은 교도소 등의 구금시설이다. 구금시설은 국가인권위 출범 전까지는 대표적인 인권 사각지대로 불렸다. 무엇보다 구금시설이 그 특성상 폐쇄적으로 운영되면서, 외부의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죄를 진 사람들에게 무슨 인권이 있느냐'는 시각도 이런 사각지대를 사회적으로 방치하는 데 한몫했다.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진정상담 및 접수, 조사 및 구제 활동은 바로 이런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편견의 양 벽을 허무는 일이었다.

국가인권위 조사 및 구제 활동은 수용자들의 일상영역부터 제도까지 폭넓게 이어졌다. 구치소 수용 당시 재판대기실에서 다른 공범들과 다툼을 벌인 한 만성신부전증 수용환자의 목덜미와 뺨 등을 구타한 교도관의 인권 침해(2003. 6. 11.) 사건은 구금시설 수용자의 인권을 논의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된 가혹행위 사례였다. 그러나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교도관들의 가혹행위와 관련한 진정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수용자들이 국가인권위 진정권을 획득하고 자기방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국가인권위의 구금시설 수용자 인권 개선은 점차 교도소 운영 등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대구교도소는 수용자가 관규를 위반했을 때 적게는 3일부터 많게는 10일까지 관규를 위반한 수용자와 같은 거실을 사용하는 수용자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TV시청 및 선풍기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는 올해 3월, 거실 내 화합 분위기 저해, 자기 책임의 원칙 위반 등을 이유로 연대책임을 폐지하도록 권고해 개선이 이뤄졌다.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인권 문제는 의료 영역에서도 두드러졌다. 손가락 부상을 입은 수용자의 상처를 의사가 아닌 일반 직원이 치료해 결과적으로 관절장애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해당자들에 대한 주의 조치를 권고했다. 특히 수용자가 보낸 서신이 교도관들의 업무소홀로 분실된 사건에 대해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도록 한 권고(2004. 9. 2.)나 수용자가 교정작품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창작한 작품을 구금시설 측이 저작자 동의 없이 임의로 처분하는 관행을 개선하도록 한 권고(2004. 9. 9.)는 수용자들 역시 비수용자들이 누리는 통신의 자유나 저작권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 권고였다.

교도소 등 구금시설에 대한 인권 개선 활동은 개별 진정사건의 인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권고를 내리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가랑비에 속옷 젖듯' 교정의 관행과 문화를 바꿔가는 것이다.

경찰관련 권고는 경찰들에게 인권 감수성을 훈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권고가 경찰업무에 있어서 인권보호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경찰관련 권고는 경찰들에게 인권 감수성을 훈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권고가 경찰업무에 있어서 인권보호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 인권위 김윤섭
경찰 관련 권고,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 역할

이처럼 진정 사건의 처리를 통해 관행과 문화를 바꿔가는 흐름은 국민 치안과 봉사의 최일선에 있는 경찰과 관련한 인권 침해 사건에서도 두드러졌다. 경찰은 접수된 전체 진정 가운데 약 21%를 차지해, 구금시설 다음으로 높은 피진정 기관이다.

경찰 관련 진정 사건은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많이 드러났다. 2002년 8월 울산중부경찰서에서 한 수사관이 강도강간 혐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할 목적으로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한 것과 관련, 검찰총장에 수사를 의뢰한 사건(2003. 3. 27.)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종종 불거지던 인권 침해의 한 유형이었다.

경찰 관련 사건의 대부분은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 건이 다수였다. 지난 7월엔 지문채취를 거부하는 피의자의 지문을 강제로 채취한 경찰관들의 행위는 인권침해라고 권고했다. 현행법상 피의자의 동의 없는 지문 채취는 수사상 강제처분에 해당하므로 영장 발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경찰 관련 인권 침해는 피의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형태로도 발생했다. 2002년 5월 남아무개 씨는 의정부지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던 도중 무고 혐의로 긴급 체포돼 약 26시간 동안 유치장에 구금됐다. 그러나 경찰은 남씨의 체포 사실을 가족에게 통보하지 않았다. 이에 국가인권위는 체포사실의 통지제도는 신체의 자유를 절차적으로 보장하는 의미가 있는 만큼 인권 침해라고 권고했다.

이 사건은 경찰이 단순히 피의자 등에게 불법적으로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것이 인권 침해의 전부는 아니며, 경찰의 인권 보호는 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피의자가 진술거부권을 고지 받지 못한 채 재산 등 개인신상 정보가 과도하게 담긴 피의자 주거 진술서 작성을 강요받았다면 이 역시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권고(2004. 9. 1.)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권고들은 경찰들에게 인권 감수성을 훈련하는 계기로도 작용해 결과적으로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3년간의 경찰 관련 국가인권위 권고는 경찰 업무에 있어 인권 보호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권고를 통한 학습효과

차별관련 진정은 7%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차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차별관련 진정은 7%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차별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인권위 김윤섭
국가인권위 활동 가운데 우리 사회의 각종 차별에 대한 접근은 그 자체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발걸음이자 새로운 전범을 만드는 일이었다. 차별 관련 진정접수는 모두 877건으로 기타 사유가 227건(25.9%)으로 가장 많고, 사회적 신분 179건(20.4%), 장애 95건(10.8%), 나이 79건(9%), 성별 72건(8.2%) 등이다.

2002년 8월 국가인권위는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색명을 지정하면서 특정 색을 '살색'이라고 명명한 것은 평등권 침해 소지가 있으므로 기술표준원에 한국산업규격(KS)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낸 적이 있다. 이 권고는 단순히 색명 한 가지를 바꾼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내재된 차별의식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헌혈 때 성적 소수자를 차별할 가능성이 있는 문진표 질문 사항 개정 권고(2004. 8. 9.), 청소년보호법시행령에 청소년 유해매체물 개별 심의기준으로 들어간 '동성애' 조항 삭제 권고(2003. 4. 2.) 등은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적 지위를 높이는 작은 전진이었다.

장애인 차별에 대한 개선 권고 역시 적지 않았다. 각 대학의 특수교육 대상자 특별전형에 지원자격을 시각·청각·지체부자유 장애인으로 제한한 내용을 없앨 것(2004. 2. 25.),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한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 제한 폐지(2003. 7. 4.) 등의 권고가 있었다.

국가인권위가 내린 차별 개선 권고 가운데는 국가기관이 자격이나 경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들이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연구직 공무원의 초임 호봉을 산정하면서 대학 시간강사 경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한 권고(2004. 10. 4.)를 통해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차별의 또 다른 유형을 확인했다.

시험제도와 관련한 일부 차별 개선 권고는 제도 개선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독학사 취득자에 대한 교사자격 취득을 제한하고 있는 교원자격검정령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개정 권고(2004. 1. 8.)를 교육부가 수용한 것이나, 4년제 대학 졸업자와 그렇지 않은 학력자에게 각각 다른 응시자격을 부여한 국가기술자격법 시행령이 차별이라며 내린 개정 권고(2003. 9. 4.)에 대해 노동부가 수용한 사례들이 그러했다.

차별 관련 진정접수 건은 현재 국가인권위가 접수한 진정사건의 약 7%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차별 관련 진정은 국가인권위의 노력이 더할수록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것은 차별이 있음에도 차별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국가인권위 권고를 통해 인권의식을 높이는 학습효과를 얻기 때문이다.

친인권 국가 기반 구축

개별 사건 조사를 통해 개인을 구제하는 역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제도 관행 등을 개선하는 일이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부터 국가 전반의 정책과 제도를 점검하고 개선하기 위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의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 NAP를 통해 국가기관이 인권 마인드를 바탕으로 하여 친인권적인 정책을 펴나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가운데)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가운데) ⓒ 인권위 김윤섭
우리 사회의 차별문제를 총체적으로 개선하고 예방하기 위해 2003년 초부터 차별금지법 제정도 추진 중이다. 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 중인 제정 활동은 국내외 차별 관련 법령 검토 및 우리 사회의 각종 차별문제에 대한 실태조사를 마치고, 현재 국회와 정부에 권고할 구체적인 법안을 만들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법령과 제도를 제·개정하는 과정에서 '인권'이라는 항목을 주요한 검토사항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종 법령과 정책 등을 인권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여러 정부기관에 권고 또는 의견표명을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 향상을 도모해 왔다.

법령과 정책 개선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는 △ 사생활의 비밀 침해 방지를 위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개선 권고(2004. 5. 교육부, 위원회 권고 수용) △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테러방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의견 표명(2004. 5. 16대 국회 회기 종료에 따라 자동폐기) △ 오랜 세월 인권 침해 문제로 국내는 물론 유엔 등 국제사회로부터 비판받아 온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 권고 △ 이중처벌 등 인권 침해 논란을 빚었던 사회보호법 폐지 권고 △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반전·평화·인권의 관점에서 의견표명 등이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인권 침해의 대표적 상징이자 현실로 인식된 국가보안법의 폐지 권고는 친인권국가로 나서기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밖에도 대한민국이 가입한 유엔 인권협약에 따른 개인통보제도의 결정을 이행하는 특별법을 마련할 것을 권고해, 국제사회의 인권 향상 노력에 대한민국이 동참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과거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와 관련, 삼청교육 피해보상 관련 특별법 제정, 북파공작원 관련 특별법 제정,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의 권고도 내렸다.

국가인권위가 기획,제작하고 여섯명의 영화감독이 연출한 영화 <여섯 개의 시선> 포스터
국가인권위가 기획,제작하고 여섯명의 영화감독이 연출한 영화 <여섯 개의 시선> 포스터 ⓒ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 출범 3년간의 활동은 이밖에도 인권 교육과 인권 홍보 측면에서도 일정 정도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인권 교육 분야에서는 인권교육발전 종합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이를 위해 정부기관·학교·인권시민단체 등 영역별 인권교육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공무원들의 인권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다양한 인권교육 교재를 발간하고, 각계 인권전문가들로 인권교육 강사단을 구성해 수시로 인권 강연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차별예방 및 인권문화 확산을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인권 영화 「여섯 개의 시선」기획·제작, 인권 만화책 「십시일反」기획·발간 등은 그 성과로 꼽힌다. 인권 교육 및 홍보는 인권을 실현하는 데 인권 침해가 발생한 후에 구제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더욱 강화해야 할 활동 영역이다.

국가인권위가 그동안 권고한 건수는 모두 307건으로, 수용 여부를 밝힌 건수는 232건, 검토 중인 사안은 75건이다. 수용 여부를 밝힌 232건 가운데 수용(187건)과 부분수용(27건) 의사를 밝힌 건수는 214건으로, 권고수용률은 92%에 달한다(표1 참조). 그만큼 인권 전담기구로서의 국가인권위의 위상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서 인용한 한 일간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가기구이면서도 입법·사법·행정부의 또 다른 국가기구들과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 '오로지 인권에만 예속된 독립적 국가기구'임을 인정받았다. 더러 인권의 이름으로 실정법의 현실을 돌파하려다 '힘깨나 있는 자'들로부터 돈키호테 취급을 받기도 했으나 '인권위 팬'들은 인권위의 그런 발칙한 도발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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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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