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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연 변호사가 지난달 5일 월간조선 주최로 열린 '이론무장을 위한 대강연' 첫번째 연사로 나서 "헌법무시는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국가의 최고 법규라는 헌법에 대한 해석만큼은 한 개인의 세계관과 양심과 철학의 문제라서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최소한 나의 경우는 그렇다.

이석연 변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헌법전문’ 변호사

이석연 변호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헌법전문’ 변호사이다. 이에 비해 나는 국회에 들어오기 전 ‘의료사고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이석연 변호사는 이번 ‘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헌법전문 변호사로서 각인됐다. 이 변호사는 지난 1988년 사법연수원 제17기를 수료한 이후 1989년 초부터 1994년 초까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일한 바 있다.

그런 그가 헌법재판소에 근무하던 지난 1989년에 쓴 논문에서는 토지공개념을 ‘사실상’ 시인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질서에 대해 사회적․배분적 시장경제질서라고 평가했다.

“(헌법 제122조, 제120조 제2항, 제35조 제3항, 제120조 제1항을 들면서) 위와 같은 헌법상의 제규정에 비추어 볼 때 우리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경제질서는 국가의 경제에 관한 폭넓은 규제와 조정이 주어지는 사회적․배분적 시장경제질서로서 특히 토지재산권에 대한 규제와 제한이 구체적인 형태로 제도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토지공개념확대도입에 따른 법률적 문제점」. 『사법행정』 1989년 11월호 54쪽)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96년에는 약간의 변화가 엿보인다.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데 좀더 무게를 둔 것으로 평가된다.

“(토지공개념제도의) 일환으로 1980년대 말 ‘토지초과이득세법’,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 및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등이 제정되었다. (…중략…) (택지)소유상한제의 도입 자체가 경제적 이익의 추구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위축을 초래하여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상 경제질서의 기본원리에 위배된다 할 것이다.”(「택지소유상한제 및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도의 위헌성」 1996년 2월. 한국토지공법학회 제3회 학술대회 주제 논문)

경제관이 사회경제적 시장질서에서 자유경제적 시장질서로 바뀐 것을 누가 탓하랴

그로부터 또다시 7년이 지난 2003년 10월, 이번에는 아예 헌법상의 경제원리는 자유시장경제원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중점이 완벽하게 이동되고 지난 1989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토지공개념까지도 헌법위반의 소지가 있는 제도로 평가가 바뀌어진다. 물론 우리 헌법재판소는 토지공개념은 합헌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노대통령이) 최근 국회 시정연설에서 도입의지를 밝힌 토지공개념 제도는 헌법상 자유시장경제원리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노정부 개혁만능 독선에 빠져」 동아일보 2003. 10. 24)

한 개인의 경제관이 사회경제적 시장질서에서 자유경제적 시장질서로 바뀌는 것을 탓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그것이 헌법이라는 고정불변의 평가대상을 놓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할 때는 좀더 신중해야 하고 논의의 일관성이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보통 변호사가 아닌 ‘헌법전문' 변호사라면 더욱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이 변호사의 경제질서에 대한 헌법해석은 정당한 것일까? 그가 수도이전에 대한 헌재판결에서 ‘승복’을 강조했던 것처럼, 헌법상 경제질서에 대한 불필요한 더 이상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헌재의 판결을 통해 ‘승복’을 강조해보자. (이는 최근 들어 논란이 되는 출자총액제, 금융기관 의결권제한제, 종합부동산세제 등에도 해당된다)

“우리나라 헌법상의 경제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1996. 4. 25. 92헌바47)”

“결국 우리 헌법은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1998. 5. 28. 96헌가 4등)”

“경제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유도하고 재분배하여야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는 경제에 관한 조항 등과 같이 사회국가원리의 구체화 된 여러 표현을 통하여 사회국가원리를 수용하였다. (2002. 12. 18. 2002헌마52)”


헌법 전문 변호사의 기본권 규정에 대한 헌법적 시각의 변화

이 변호사의 헌법 지식에 견주면 필자의 그것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글이 '헌법전문' 변호사인 이 변호사의 헌법적 입장에 대해 법률전문가로서 최소한도의 반론적 성격을 담고 있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최근 들어 이 변호사의 글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 헌법포럼 결성 등을 포함한 조직적 확대의 움직임, 더구나 각종 강연 등을 통해 위헌을 주장하기만 하면 곧바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위헌시비가 일어 사회적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 또한, 반론의 필요성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여기에다가 올바른 헌법논쟁은 헌정사 56년 동안 무려 8차례나 권력자의 편의에 의해 개정을 되풀이 해온 우리 헌법의 가치를 미약하나마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점도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다만 학술적 반론이 아닌 칼럼의 성격을 띤 시론적 반론임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논리 전개를 위해 이 변호사가 과거에 했던 글과 발언 앞에는 ■ 표시를 했으며, 최근 들어 과거와는 약간 또는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는 글과 발언 앞에는 ● 표시를 했다.

■ “성장과 능률을 최우선시한 개발독재적 국가경영논리는 이제 절차적 정의에 입각한 형평과 배분의 시책에 그 우선순위를 양보할 때가 된 것이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전북일보 1994. 6. 24)

이 변호사가 ‘형평과 배분’을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4년의 일이다. 아래의 글도 큰 맥락에서는 같은 흐름이다.

■ “인권활동의 방향도 사상 및 신체의 자유와 같은 고전적 자유에만 국한하지 말고 사회보장 환경 소비자 노인복지 등 삶의 질과 관련 있는 현대형 인권으로 지평을 넓혀야 하며”(「‘국민만이 주인’ 헌법 등대지기」 주간동아 1996. 1. 25.)

■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의 보장이야말로 어떤 이념이나 제도에도 양보할 수 없는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대법원 판결도 헌법소원 대상이다」 한국일보 1997. 12. 29)

● “(국보법의 존치 필요성을 강조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한쪽으로만 치우쳐 가는 급진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는 대법원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기울여야 한다. 대법원의 결정을 국보법의 합리적인 개정에 반영해야 한다. (중략) 대법원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이는 입법권의 침해가 아니다.”(「입법간섭 부적절… 시대흐름 반영 못해」 동아일보 2004. 9. 2)

● “통일 후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두 축으로 하는 법치주의 체제여야 하며 이를 뛰어넘는 체제는 없다. (중략)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정부의 통일정책은 위헌적”(「현 정부 통일정책 위헌적이다」 연합뉴스 2004. 11. 5)

● “병역의 의무를 신성시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기본권도 제한될 수 있다는 의견이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에 대한 존중보다도 우선시 돼야 한다는 의견이 사회적 통념이다. 앞으로 국민들의 안보의식 및 병역의무의 이행과 관련해 상당히 우려되는 판결”(「‘양심적 병역기피’ 첫 무죄 선고」 동아일보 2004. 5. 21)


1997년 글은 어떤 이념이나 제도보다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2004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더 나아가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입장에 선다. 그것도 사회적 통념이라는 입장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비판하는 것은 국론분열이고 국가경쟁력의 낭비다?

그의 또 다른 주장을 보자.

■ “낙천․낙선자를 언론과 사이버공간 등을 통하여 공표하는 것은 허용하면서 그보다 행위의 외연이 적은 서명, 가두캠페인 등을 금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법체계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의 헌법상 보장된 정치적 영역에서의 평등권, 표현의 자유, 알 권리 및 참정권 등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저항권과 헌재의 역할」 한국일보 2000. 2. 15)

● “ 법을 위배한 선거운동은 아무리 그 목적이 정당하다 해도 합리성과 타당성이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 법치주의의 원리다.”(「낙천운동, 과연 객관적인가」 동아일보 2004. 2. 5)
어느 곳에서는 개인의 기본권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 하지만 또 다른 글에서는 갑자기 이런 태도가 바뀌어 사회질서가 강조되는 것이다.

■ “(헌법재판소가 국정감사장에 방청불허를 합헌이라고 한 결정에 대해) 헌재가 강자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의 시국관과 헌법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헌재도 개혁대상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한다. 제2기 헌법재판관들이 내린 결정을 토대로 재판 성향을 분석할 것이다. 과연 헌재 재판관들이 시민의 입장에서 결정을 내렸는지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조목조목 짚어보고”(「헌재도 개혁 대상… 성역은 없다」 법보신문 2000. 7. 26)


어쨌거나 2000년의 글에서 그는 헌법재판관들의 시국관과 헌법관이 의심스러울 정도라며 단호했다. 그러니 헌재의 재판성향을 분석하는 일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2004년 신행정수도이전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비판하는 것은 국론분열이고 국가경쟁력의 낭비가 된다고 한다.

●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이 위헌이라는) 선고결과에 대해 학계의 판례비평이나 학술활동은 좋지만 정치인, 법조인의 정치적 비판은 지양됐으면 좋겠다. 더 이상 국론분열을 방지하고 국가경쟁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겸허히 승복하는 자세가 절실하다”(「헌법소원 중단 압력 많았다」 동아일보 2004. 10. 22)

여기까지 살펴보건대, 이 변호사의 말과 글 그리고 그가 당시 주로 담당하던 업무 사이에 연관관계가 발견된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이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후 1989년부터 1994년 초까지는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이었고 그 다음에는 변호사로 일했으며 1995년 9월부터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이 되었다가 1999년 11월부터 2001년 10월까지는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일한 바 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위험성 : 태아 성감별은 병아리 성감별과 다르다

“태아의 성감별 금지규정은 의사의 직업의 자유, 양심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임부와 그 가족의 알 권리 및 행복추구권도 침해하고 있다.”(「태아성감별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다」 한국의료법학회 학술세미나 주제발표문 1997. 2.)

과연 그럴까? 과연 이렇게 밖에 헌법이 해석되지 않는 걸까? 성감별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왜 태아의 존엄성과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그리고 양성평등 조항은 깊이 고려되지 않는 걸까?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헌법조항은 왜 같은 가치로 평가되지 않는 걸까?

이 변호사는 위 논문에서 의사는 성감별을 원하는 환자의 요청을 거부하면 의료법 제20조 제2항으로 처벌되는 것이 불합리하며 ‘체계정당성에 반하는 입법권의 행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 따져보자. 태아성감별 행위 자체가 태아에게나 임부에게나 남녀성비 균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가치중립적 행위인가? 태아 성감별이 병아리 감별과 같은가? 하지만 아래의 글에서는 유달리 남녀평등이 강조된다. 두 글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 걸까?

■ “저는 기본적으로 가족법상 남녀평등에 위배된 조항은 헌법정신에 맞게끔 고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호주제는 남계위주이기 때문에 헌법정신에 확실히 어긋나는 게 사실입니다.”(「남녀차별의 법제도, 헌법정신에 맞게 고쳐야」 여성신문 1999. 12. 3)

개인의 기본권이냐, 아니면 사회질서나 공공복리냐. 개인의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느냐, 아니면 소유권의 공공성을 인정하느냐. 국가의 개입을 철저히 반대하는 완벽한 시장경제질서를 선호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시장경제의 폐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규제와 조정 권한을 인정하느냐. 이 모든 물음들은 결국 한 개인의 세계관과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물론, 생각도 변할 수 있고 세계관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변하건 헌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마치 ‘장님 코끼리
▲ 최재천 의원
만지는 식’으로 코끼리 다리만 만져보고는 코끼리라고 했다가, 코끼리 코를 만지고는 다시 그게 코끼리의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는 그저 그 자리에 코끼리인 채로 있다. 객관과 주관을 혼동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위헌론이 판치는 지금의 헌법해석이 마치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헌법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내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마치 헌법이 바뀐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헌법은 그대로 있는데, 내 생각은 이렇게 바뀌었다고 얘기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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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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