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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주산인 백악과 인왕산 자락에 차분히 안겨있는 경복궁
서울의 주산인 백악과 인왕산 자락에 차분히 안겨있는 경복궁 ⓒ 한석종
흥례문 사이로 백악과 근정문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걸려있다.
흥례문 사이로 백악과 근정문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걸려있다. ⓒ 한석종
궁궐 안에는 왕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궁궐 안에는 왕의 가족과 그 수발을 드는 내시, 궁녀, 노복들이 살았으며, 관원, 이서, 상인, 군인, 외국사신 등 각양 각층 사람들이 드나들며 함께 호흡하며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궁궐은 온갖 신분,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움직이는 아크로폴리스였다. 그런 만큼 궁궐에는 그에 걸맞는 많은 전각들과 시설들이 존재했다.

즉 왕의 집무실에서부터 관원들이 일하는 여러 관청과 내시, 궁녀, 노복들이 일하는 장소 - 부엌, 창고, 우물, 다리, 연못, 각종 생활도구 등 여염집에 있음직한 물건 또한 궁궐 내에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백악의 뒷심으로 추상같은 위엄을 갖춘 근정전
백악의 뒷심으로 추상같은 위엄을 갖춘 근정전 ⓒ 한석종
다듬은 듯 다듬지 않는 듯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불분명한 박석(薄石)으로 깐 시원한 조정(朝廷)과 근정전
다듬은 듯 다듬지 않는 듯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불분명한 박석(薄石)으로 깐 시원한 조정(朝廷)과 근정전 ⓒ 한석종
회랑안에서 살짝 비켜서 바라본 근정전
회랑안에서 살짝 비켜서 바라본 근정전 ⓒ 한석종
우리 궁궐은 수난의 역사다. 수많은 외침의 영향은 접어두고 구한말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일제가 물러나고 미군정으로 그리고 6·25전쟁과 군사독재정권까지 이어진 무차별한 개발의 거친 격랑을 거치면서 궁궐의 제 모습은 아연 퇴색되고, 마치 내용물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조개처럼 죽은 궁궐 바로 그 모습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기단 난간 사이로 언뜻 비친 근정전의 기개
지나가는 길에 기단 난간 사이로 언뜻 비친 근정전의 기개 ⓒ 한석종
세상의 모든 시름 다 거두어 푸른 창공에 날려버릴 것만 같은 근정전의 지붕선
세상의 모든 시름 다 거두어 푸른 창공에 날려버릴 것만 같은 근정전의 지붕선 ⓒ 한석종


근정전 천정에 그련진 용의 발톱은 왜 일곱개일까?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에는 구름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마치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듯한 목각이 새겨져 있다.

용은 동양사회에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신성시 여겨온 가상의 동물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용의 발가락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발톱 수에 따라서 용이 상징한 사람의 격을 구분하였다.

대부분 발톱이 다섯 개 이하인데 드물게 일곱 개인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오조룡(五爪龍)은 왕을 상징하며 발톱이 일곱개인 칠조룡(七爪龍)은 황제를 상징하는데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에는 용의 발톱 수가 일곱개인 칠조룡이 그려져 있다.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 한석종
근정전과 달리 사정전 편전에는 사조룡(四爪龍)이 걸려있다
근정전과 달리 사정전 편전에는 사조룡(四爪龍)이 걸려있다 ⓒ 한석종
근정전 천장에 그려진 용의 발톱이 왜 일곱 개인가? 일제시기에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관련서적을 뒤져 확인해 본 결과 분명 발톱이 일곱인 것이 확연히 나타나 있다.

다른 궁궐과 사정전 편전에 걸려있는 용의 발톱 수와 왜 다른가? 1863년 흥선대원군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아들 고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865년에 궁핍한 나라살림에도 불구하고 척신의 발호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 중건에 박차를 가한다.

왕의 권위가 강화되면 될수록 더불어 자신의 위상도 높아지리라는 걸 염두에 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 고종이 청나라 황제와 견주게 함으로써 감히 척신들의 발호를 차단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위마저 황제의 반열에 슬쩍 끼워 넣고 싶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이 같은 추정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아무런 사료를 찾지 못했다.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으로 단지 유추해 볼 뿐.

죽은 궁궐의 모습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우선 궁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알고 보면 예전과 다르게 보이는 법. 우리의 궁궐, 역사 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주 찾아다닌다면 자신도 모르게 궁궐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소중한 마음이 깃들며 연정이 싹틀 것이다.

이런 사랑스런 눈으로 그윽이 바라볼 때 근정전 천장의 칠조룡(七爪龍)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며 용트림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퇴락한 왕조와 영욕을 함께한 수양버들의 고뇌가 마디마디 맺혀있다
퇴락한 왕조와 영욕을 함께한 수양버들의 고뇌가 마디마디 맺혀있다 ⓒ 한석종
궁궐에 가서 무엇을 볼 것인가?

지금 남아있는 건물과 시설의 겉모양만 보고 와서 아는 체 하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 역사와 선조들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복원된 시설들이 그 당시의 사실에 미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심히 훼손되고 왜곡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소리를 하기 십상이다.

궁궐을 제대로 보려면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현상을 뛰어넘어 그 당시의 원형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과 그곳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 다양한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까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장한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궁궐의 내력에 대하여 돋보기라도 들이대며 꼼꼼히 살펴보고, 나아가 그렇게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짚어보는 도량을 갖춰야 한다.

더욱이 왕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삶의 궤적과 생각까지를 염두에 두면서 답사를 한다면 조만간 궁궐의 제 모습이 우리에게 분명 새롭게 다가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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