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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7일 유달산에서 기념사진
2004년 12월 7일 유달산에서 기념사진 ⓒ 서정일
일곱 살 유치원생 서해성, 그가 오천원으로 할 수 있는 여행은 어떤 것일까? 돈이란 개념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나이지만 손에 쥐어진 오천원은 난생 처음 받아본 큰 돈임엔 틀림없다. "열차 타고 싶어요" "박물관에 가고 싶어요" 해성이의 바람은 그 두 가지. 하지만 우린 산행 하나를 추가했다.

7일 오전 7시 40분. 순천역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우리를 맞이했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새벽은 늘 약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하지만 따뜻한 맞이방 한 구석엔 고개를 푹 숙인 채 꿈나라를 헤매는 이도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대는 변했지만 기차역의 새벽 풍경은 똑같다.

'통근열차'. 그 이름도 생소하다. 예전에 역마다 섰던 완행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까? 목포까지 서른 한 개의 역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꼬박 꼬박 도장을 찍는 열차.

해성이와 동생 유정이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무임승차다. 그들에게 돈 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차비를 벌었다고 좋아하면서 오천원을 손에 들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는 해성.

오천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중인 해성
오천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 중인 해성 ⓒ 서정일
4시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다. 어린 해성이에게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걸 참기엔 너무나 긴 시간. "왜 매점 아저씨가 왔다 갔다 안 해요?" 큰 맘 먹고 끄집어 낸 말이다. 아마도 오천원을 쓰겠다는 결심을 한 모양.

하지만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통근열차엔 해성이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매점 아저씨는 없다고 한다. 표정엔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다. 하지만 입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우리는 가방에서 아침에 준비한 간식을 내 놓았다. 그제야 표정이 약간 풀린다.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있는 유달산 등산로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있는 유달산 등산로 ⓒ 서정일
"엄마, 여기 와 보세요 꽃이 피었어요!" 개나리였다. 겨울이라 할 수 있는 12월 초순 유달산에 개나리가 피어 있을 줄이야. 반갑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한참을 바라보다 정상을 향했다.

잘 정돈된 공원 같은 산 유달산.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은 이름에 걸맞은 일등바위. 하지만 산 정상의 높이는 얼마인지 알면 웃을지도 모를 227m. 아이들과 산책 겸 운동 겸 오르면 참 좋은 산이다. 하지만 밋밋한 산은 아니다 바위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먹어야 할 음식, 낙지
목포에서 먹어야 할 음식, 낙지 ⓒ 서정일
너희가 낙지 맛을 알어? 목포 하면 낙지, 낙지는 역시 목포다. 산행을 군소리 없이 마친 해성이와 유정이가 자랑스러워 한턱 쏜다고 데려간 곳은 낙지전문점.

가끔 먹어보긴 했어도 본 고장 맛을 제대로 봐 보라는 뜻에서 푸짐하게 한 상 차렸다. 물론 운전에서 해방된 나와 아내는 낙지에 곁들여 소주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

"음료수 한 잔 할래?" 우리끼리만 마시는 게 미안해서 넌지시 물어보니 해성이는 호주머니에서 돈만 만지작만지작 한다. 여느 때 같으면 한 병을 주문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꾹 참고 모른 체 해 본다. 이번 여행을 통해 뭔가 느껴볼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은 욕심에 두번 다시 물어보지 않고 식사를 마감했다.

부둣가를 걸으며 좋아하는 해성과 유정
부둣가를 걸으며 좋아하는 해성과 유정 ⓒ 서정일
해성이와 유정이가 항구를 보고 이렇게 큰 배를 구경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 태어나 순천으로 온 게 얼마 되지 않았고 항구에 데리고 가 본 기억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지 선착장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해성이와 유정이. 바라보고 있자니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에게 여행다운 여행 한번 없었음에 미안한 생각이 밀려온다.

입장료가 공짜라며 좋아하는 해성
입장료가 공짜라며 좋아하는 해성 ⓒ 서정일
"엄마, 여기 해양전시관도 공짜야!" 팔짝 팔짝 뛴다. 지금껏 한푼도 쓰지 않은 해성이. 유치원생이 공짜라는 특혜를 유감없이 누리고 있다. 예전엔 목포가 유달산을 빼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리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전시관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시관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 서정일
예술의 고장답게 글 그림 전시장이 많고 특히 자연사 박물관과 해양유물 전시관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하나 하나 꼼꼼히 살피다 보니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너무나 아쉽고 짧은 목포여행.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선 하나 하나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박물관에선 하나 하나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 서정일
20여분 시간이 남은 기차역 맞이방, 아까부터 자판기 옆을 연신 왔다 갔다 하는 해성이, 엄마보고 1000원짜리로 바꿔달라고 하더니 음료수 두 병을 산다. 동생과 먹으려고 1000원을 쓴 것이다.

"차비 없으면 어떻게 집에 가려고?" 하고 다그치니 배시시 웃으면서 "공짜잖아요" 하고 대답한다. 큰 실수를 저지른 셈. 아침엔 통근열차를 탔지만 갈 때는 무궁화호를 타야 한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할 수 없이 선택한 것. 그런데 문제는 좌석배정이 확실한 무궁화호는 할 수 없이 아이들 표도 끊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설명하면서 "너희들은 이제 돈이 모자라니 집에 갈 수 없어"라고 하니 울음을 터트린다.

결국 음료수 사 먹기 위해 1000원을 쓰고 마는 해성
결국 음료수 사 먹기 위해 1000원을 쓰고 마는 해성 ⓒ 서정일
달래고 달래서 열차에 태운 지 10여분, 곧바로 잠에 골아 떨어진다. 오늘 여정이 많이 힘든 듯. 자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하루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너무나 소중한 여행이었음을 깨달았다.

여행하면 늘 자가용이었던 것이 대중교통으로 바뀌었고, 아이들에게 미리 돈을 주면서 계획을 세워보게 했고, 산행을 하면서 운동을,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공부를…. 참 소중한 하루였다.

"엄마한테 해성이가 1800원 빚 진 거야. 나중에 꼭 갚아야 한다." 순천역에 내려 다시 다짐을 주고받는 모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음엔 어디를 또 데리고 가볼까" 하고 생각했다. 전에 없던 생각이다. 아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려고 계획한 여행. 아이들의 변한 모습보다 더 많이 변한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순천역에 도착해서 여행 결산을 하고 있는 모습
순천역에 도착해서 여행 결산을 하고 있는 모습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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