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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샨사 장편소설 <바둑 두는 여자> 표지
ⓒ 현대문학
우리는 한국의 부산에 상륙한다. 기차에 빽빽이 몸을 실은 채 우리는 북쪽으로 하염없이 달려간다. - <바둑 두는 여자> 2절 중에서

중국은 내전으로 이미 거덜났어. 언젠가 우리가 중국 영토 전체를 한국처럼 식민지로 삼을 날이 오고 말 거야. 두고 봐. (이하 생략)" - <바둑 두는 여자> 4절 중에서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 선정한 가장 읽고 싶은 책 '콩쿠르 데 리쎄앙 상'을 받았다는 <바둑 두는 여자>. 중국인으로서 프랑스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샨사(34)의 셋째 장편소설이다.

둘째 장편소설인 <버드나무의 네 가지 삶>은 한국에서 번역돼 나오지 않아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바둑 두는 여자>는 프랑스에서 그녀를 알린 첫 장편소설 <천안문>과는 분명히 다른 기법과 감동을 맛보였다.

분량도 두 배가 넘지만, <천안문>에서 택한 3인칭 서술이 1인칭으로 크게 바뀌었다. 92절로 잘게 나누어진 1000장 내외(200자 원고지 기준)의 이 소설은, 한 여자와 한 남자를 화자로 삼은 1인칭 시점으로 줄곧 번갈아가며 심리를 끌어내고 현장을 관찰하여 묘사하고 있다.

1931년 가을의 일본군 만주 점령이라는 배경이 짙게 깔린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설명은 어쩌다 잠깐씩 흐르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현재진행형의 시제로 일관되어 있다.

읽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대하소설 읽는 만큼 시간이 걸렸다. 아주 짧은 표정을 한 문체인데도 그 표정을 읽어내는 일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루해서 그랬다는 뜻이 아니다.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시간을 그리워하며 읽었다고 할까. 그만큼 치열하게 직조(織造)된 그물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대하소설처럼 2대에 걸친 많은 사건을 담고 있고, 그것을 조립해 가며 작가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신선한 재미를 일깨워 준다. 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여자 주인물(主人物)과 남자 주인물의 대국(對局) 장면이 담고 있는 점층적인 상징성은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매력이다.

이 소설의 여자 주인물과 남자 주인물은 바둑을 제법 두는 사람이다. 여자는 16세 중국인 여학생, 남자는 일본 육군 중위. 이들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만주의 첸훵광장에서 바둑의 호적수로 운명처럼 만난다.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옛 남자와 옛 여자가 있었다. 남자 주인물에게는 뤼미에르라는 수습 게이샤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처녀성을 잃어야 하는 게이샤의 통과의례를 위해 뤼메에르는 남자 주인물을 선택하지만, 남자 주인물은 단도로 자신의 팔을 그어 그녀의 흰 비단 띠에 피를 묻히는 것으로 통과의례를 대신해 주었다.

여자 주인물에게는 저항군 민이 있었다. 민을 통한 여자 주인물의 첫 경험은 그녀의 독백을 통해서 이렇게 드러난다.

첫 경험 때는 피가 많이 나온다고들 하지만 난 전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신은 여자들을 질겁하게 만드는 그 끔찍한 경험을 나에게는 면제해주었다. - 39절 중에서

여자 주인물과 남자 주인물이 만나 바둑을 두다 휴전하는 동안에 남자 주인물의 서술을 통해 이런 부분이 나온다.

중국 소녀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간 사이, 나는 손님이 거의 없는 한국 식당을 택해 들어간다. 나는 냉면을 주문한다. 나는 텅 빈 홀이 한눈에 보이는 구석에 앉아 오가는 종업원들을 흘끗흘끗 살피며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써본다. - <바둑 두는 여자> 52절 중에서

왜 한국 식당으로 들어가게 했는지, 혹 그럴 기회가 온다면 샨사에게 물어보고 싶다. 특별한 뜻을 담아 놓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더러 '한국'이라는 고유명사가 나올 때는 이 소설이 좀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저항군 민은 그와 하나가 된 탕과 함께 처형되었고, 여자 주인물은 임신으로 고생하다가, 친구 홍과 함께 간 한의원에서 자궁 속의 생명을 없애 버리는 의사의 처방을 받는다.

"절 좀 지켜주세요. 혹시 제가 잠들더라도 깨우지 마시고요." - <바둑 두는 여자> 78절 중에서

숲속의 빈터에서 여자 주인물과 한 몸이 될 기회가 오지만 남자 주인물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대리배설이었을까, 아니면 '화류계의 여자들에겐 아침이슬과 같은 은밀한 신선함이 있다. 삶에 환멸을 느낀 그들의 영혼은 군인들의 영혼과 흡사하다. (중략) 우리의 포옹에는 종교적인 순수함 같은 것이 있다'고 하는 매춘녀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남자 주인물은 난초라는 매춘녀를 상대하는 것으로 성욕을 배출한다. 그러나 그는 난초에게서도 멀어져 간다. 난초는 숱한 일본군 장교를 상대하는 단지 한 매춘녀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자 주인물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사촌오빠 류, 그리고 민의 친구 징이 여자 주인물을 짝사랑하는 이야기는 남성을 끌어당기는 그녀의 매력이 어떻다는 걸 실감케 해준다.

그런데, 이 소설의 여자 주인물과 남자 주인물은 전쟁터에서 싹튼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걸까?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 자물쇠는 풀린다. '한 수 한 수는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발걸음이다. 나는 그 미로들 때문에 바둑을 사랑한다'고 독백하는 여자 주인물은 베이징 함락 이후 남장을 하고 일본군에게 쫓겨 다닌다.

그러다 일본군 병사들에게 잡히고 만다. 남자 주인물도 함께 있는 상황. 히야시 중위가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 그 상황은 남자 주인물의 시각으로 초조하게 펼쳐진다.

"건드리지 말아요." 그녀가 울부짖는다.
"여자 아냐?" 히야시가 칼을 칼집에 넣으며 외친다.
그가 날 밀치고는 포로를 넘어뜨린 다음 그의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중략)
그가 그녀의 따귀를 후려치고는 신발과 바지를 벗긴다. 그가 자기 허리띠를 푼다.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그 주위로 몰려든다.
(중략)
"개자식들!"
내가 중위에게 달려든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자기 이마를 겨누고 있는 내 권총을 보고는 그가 껄껄거리며 웃는다.
"좋아. 자네가 먼저 하게. 어쨌거나 자네 소대가 찾아낸 계집이니까." - <바둑 두는 여자> 92절 중에서


바둑으로 만났던 남자 주인물의 '사랑'의 대상인 여자의 주인물을 이렇게 끔찍한 찰나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이 남자 주인물이라면 어떻게 당신의 사랑을 보호할 것인가. 소설은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전쟁터라는 극한 상황에서 꽃으로 피워낸 샨사의 사랑법. 남자 주인물에게 한 자루 권총이 있었기에 가능한 남녀의 사랑. 그 '참사랑'의 묘사를 읽어나가는 순간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겨울의 한복판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쌀쌀한 계절이건만, 이 참사랑의 찬란함에 다가서는 순간에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굳게 다지는 남자 주인물(일본군 중위)의 각오 한 가지가 떠오른다.

일본인들은 행동을 통해, 중국인들은 죽음을 통해 영광의 길을 찾았다. 그들 집단자살의 비장함은 슬픈 아이러니로 얼룩져 있다. (중략)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문명은 수없이 많은 철학자, 사상가, 시인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의 에너지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훨씬 빈약하긴 하지만 우리 일본문명은 본질적인 문제를 직시했다. 행동하는 것이 바로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 <바둑 두는 여자> 14절 중에서

샨사는 <레코 레퓌블리캥>과 한 인터뷰에서 "왜 일본군 장교와 중국 소녀로 하여금 대결을 벌이게 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과 중국을 대치시키는 이 갈등 속에서 바둑은 8년간 지속된 뼈아픈 전쟁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또한 관능적인 첫사랑을 발견한 중국 소녀와 사랑의 감각이 마비된 일본군 장교와의 지평이 서로 다른 두 존재의 대결이기도 하지요."

전쟁터에서의 슬픈 운명을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고 나도 죽는' 가장 처절한 방법을 통하여 '참사랑'으로 승화시킨 이 소설은, 정성스럽게 잘 감아놓은 실타래를 한 바퀴 한 바퀴 조심스럽게 풀어나가며 읽도록 하는 깊은 맛을 지니고 있다.

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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