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작품을 쓰면서 등장인물의 이름을 짓게 마련이다. 이때 작명하는 하나의 철칙이 있다면 실명을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명을 쓰게 되면 상상력이 위축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소 고발의 후유증마저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 왔지만 창작집 <은행나무 사랑>에서만은 유일하게 한 사람의 실명을 밝혔다. "그의 이름은 이근안보다 더 잔인한 고문 기술자 이OO였다"고.
1984년 난 대전교도소 지하실에서 그로부터 이른바 '비녀꽂기' 고문을 당했다. 보안과장 면담을 신청했는데 이OO 부장이 면담을 시켜주겠다며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데려갔다. 작은 키에 뱀눈처럼 소름끼치는 눈빛을 지닌 그는 다짜고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니 포승줄로 손목을 친친 묶었다. 묶은 두 손을 머리 뒤로 젖혀 빼내어 줄을 당기자 등이 활처럼 휘어지고 팔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줄을 당기는 데 힘이 부치자 조수인 '조폭' 출신 수용자 한 명에게 힘을 보태게 했다.
당긴 포승줄을 엉덩이와 사타구니 쪽으로 뽑아 다시 몸을 한 바퀴 감은 뒤 허리에 묶어 단단하게 고정시키자 금세 어깨 인대가 엿가락처럼 쭉 늘어나면서 어깨가 찢어지고 쇄골이 으스러지는 듯 격심한 통증을 느꼈다. 어깨와 등줄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0.1초 간격으로 찾아와 마치 한 시간이 1년처럼 느껴졌다.
난 그의 발밑에서 덫에 걸린 짐승처럼 뒹굴며 괴로운 비명을 지르다, 나중에는 "부장님, 잘못했으니 제발 좀 풀어 주세요!"하고 눈물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애걸했다. 그래도 그는 풀어 주지 않은 채 냉정하게 지하실을 나가 버렸다.
난 텅 빈 지하실에서 무려 두 시간 동안 땅바닥을 뱅글뱅글 뒹굴며 쉰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제서야 비명을 들은 다른 담당이 달려와 나를 풀어 주었다.
이 끔찍한 고문을 겪은 후 가족 면회 때 비인간적인 비녀꽂기 고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당시 인권운동을 하던 이태복씨가 찾아와 교도소 소장에게 고문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자 이OO는 나에게 찾아와 일절 고문을 당한 사실이 없다는 거짓 진술서를 강제로 받아갔고 그 뒤 다시 나를 지하실로 데리고 가더니 두번째로 비녀꽂기 보복을 가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그 때의 절망감이라니. 그러나 용기를 내어 면회를 통해 외부로 이 사실을 알렸고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가 와서 고문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자 교도소 측은 고문한 적이 없다고 다시 부인한 뒤 날 대구로 이감시킴으로써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난 출소하고 작가가 되었다. 간간이 이OO 부장에 대한 복수심이 타올라 직접 대전으로 찾아가려고도 했지만 글 쓰는 일로 바빠 번번이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난 1997년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으로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이OO 부장을 옆에서 도와주던 박아무개라는 수용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박아무개는 소위 '꼴통' 짓을 하다가 이OO의 '비녀꽂기'에 걸려 들어 항복한 뒤 그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한다. 박아무개는 그때 줄을 당기고 사려 준 것이 미안했다고 사과하며 비녀꽂기 고문의 실체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고문을 거들어 준 경우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데 하물며 이OO에게 직접 고문을 당한 수용자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난 그 사람 행방에 대해 물었다.
"퇴직했지요. 그런데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죽었다더군요."
옛말에 법이 악을 징벌하지 않을 때 하늘에서 천벌을 내린다고 했던가. 그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어깨가 망가져 지금도 글을 쓸 때마다 격심한 통증을 느낀다. 특히 긴 글을 쓸 때는 어깨에 파스를 몇 개나 갈아 붙이며 써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간혹 소름끼치는 '비녀꽂기' 고문을 당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초자연적인 인과응보의 시스템만에만 의존해야 하는 인권 사각지대는 없는지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