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많은 학교가 '문학의 밤' 행사를 열었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문학의 밤' 대신 교내용 학예발표회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시인되기를 꿈꾸며 타이핑한 시집까지 만들었던 나에게는 다른 학교의 '문학의 밤' 행사에 가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찐빵집에서 여고생을 만날 때도 교복을 입고 만나야 했던 그 시절, 여고 '문학의 밤' 행사에 갈 때는 세상이 모두 내 것이 된 기분이었다.
예술대학에 다닐 때는 학교방송국에서 성우로 활동하며 '예장문예'라는 시낭송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내가 직접 대본을 써서 시낭송을 하고는 시인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매주 수요일이었던가, 등교할 때 흘러나오는 시낭송은 예술학도들이 시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나는 방송연예과 학생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낭독의 발견>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프로그램이 KBS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방송 1주년을 맞이했고, K2 프로젝트 우수기획상과 우수프로그램작품상, 2004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2004 'Japan Prize'에도 출품했다고 하는 문화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
"이 책, 종이 냄새가 왜 이리 좋을까?"
시가 방송매체를 타고 꾸준히 안방에 전해진다는 것, 그리고 시인의 삶이 초대명사들을 통하여 직접 전해진다는 것, 얼마나 큰 기쁨인가. KBS <낭독의 발견>에 소개된 주옥같은 시와 시인의 참모습을 담은 책이 바로 제목을 그대로 한 <낭독의 발견>이다.
"이 책, 종이 냄새가 왜 이리 좋을까!"하는 감탄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게 만드는 <낭독의 발견>. 이 책에는 그동안 <낭독의 발견>에서 낭독되었던 글들과 그에 얽힌 출연자들의 이야기 외에도, 출연자를 섭외하는 과정이며 녹화 때의 이야기며 개인적인 인상 등을 홍경수 PD가 프로롤그와 에필로그에 사색 깊고 재미있게 적어 놓았다.
이 책에는 방송에 출연했던 시인과 가수, 연기자 등 명사 28인이 등장하고 있다. 박동규, 고두심, 도종환, 양희은, 피천득, 김혜자, 노영심, 나희덕, 황지우, 김지운, 천상병, 안도현, 유열, 정현종, 김용택, 안성기, 한대수, 윤석화, 이병우, 홍세화, 한영애, 김중만, 김윤아, 성시경, 나윤선, 하덕규, 강신혜, 정태춘 등.
시인들은 모두 자기 시를 들려주고 있지만, 다른 명사들은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시를 들려주고 있다. 박동규 교수는 부친인 박목월의 '나그네'와 '가정'을, 고두심씨는 황지우의 '늙어가는 아내에게'와 문충성의 '제주 바다'를, 양희은씨는 자신이 작사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와 안도현의 '사랑, 당신을 위한 기도'를, 노영심씨는 자신의 시와 더불어 서정주의 '봄'을, 유열씨는 박건호 작사 '이별이래'와 조동진 작사 '제비꽃'을.
안성기씨는 정현종의 '사람이 풍경으로 태어나'와 이병우 작사 '11월, 그 저녁에'를, 윤석화씨는 도종환의 '담쟁이'와 황동규의 '기도'를, 한영애씨는 한돌 작사 '완행열차'를, 김중만씨는 도종환의 '폐허 이후'와 김지하의 '남한강에서'를, 성시경씨는 김종완의 '그의 시 & 그녀의 시'를, 나윤선씨는 기형도의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연필 깎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올 때면'
특히 박동규 교수가 더듬어가는 박목월 시인의 회상 대목에서 나는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삼십 리 길을 걸어 은행으로 출·퇴근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퇴근 길 비가 온 뒤라 미끄러운 논둑을 조심조심 지나시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셨다고 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닳아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들이 차례차례 찍혀 있는데, 그걸 바라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갑자기 주저앉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새긴 발자국 안의 남도 삼백 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먼 산을 등지고 앉아 저녁 무렵의 지는 태양 아래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어느 마을이 무척 그리워지셨던 것이다. 그때의 느낌을 시로 쓴 것이 <나그네>이다. - <낭독의 발견> 16쪽에서
...아버지께서 연필을 깎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시를 쓴다는 신호였다. 아버지께서 시를 쓰기 시작하면, 한밤에 우리 집은 비상이 걸린다. 산문은 만년필로 쓰셨지만, 유독 시를 쓰실 때만큼은 연필을 사용하셨다. 연필을 깎은 것을 마음의 심지를 깎는 일인 양 참 정성을 기울이셨다.
시를 쓰기 위해 연필을 깎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올 때면, 우린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아버지는 시를 쓰시며 웅얼웅얼 거리셨다. 시를 완성하시면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워서라도 창작한 시를 나직한 목소리로 낭송해 들려주셨다. - <낭독의 발견> 20쪽에서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 자신이 읽은 시도 <낭독의 발견>에 들어가 있지만 윤석화씨와 김중만씨도 방송에서 도종환 시인의 시를 읽었다. 한때 전교조 활동으로 투옥됐던 적이 있는 도종환 시인의 근황에 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요즘 도종환'의 순백(純白)의 모습을 지치도록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요즘 면역기능이 저하되는 병인 '자율신경실조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본인의 의지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요양하고 있는 시인은 <낭독의 발견> 출연 요청을 고사하였고, 남은우 PD가 속리산으로 찾아가 다시 부탁을 하여 겨우 시낭송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시인이 속리산 자락에서 읽은 시 가운데 한 편이 '눈덮인 새벽'.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 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략)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아침 내가 많이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내겐 강물 같고 남에겐 서릿발 같은
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지워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저 눈처럼
덮어주는 일이 풍요로운 모습이 되고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 <낭독의 발견> 37~38쪽에서
이 얼마나, 차디찬 눈더미가 심장에 파고든 듯 시리도록 아프고 , 또한 햇빛 받아 찬란히 빛나는 눈밭처럼 따뜻한가.
'지금 홀로 지내는 속리산 자락의 산과 산 사이의 양지바른 이곳이 참 좋다'며, '문학에 대한 욕심을 덜 부리고, 어느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너그러움을 배우는 요즘의 삶은 도시에서 살았을 때보다 간소하다. 그렇게 차분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이다. 그 새벽이 문틈 사이로 또 지고 있다'고 하며 '아파서 오히려 고맙다'고 사색하는 시인 도종환. 나는 <낭독의 발견>의 행간을 통하여, 지치도록 아름다운 도종환 시인과, 만나지 않고도 만날 수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여도 좋다
2005년에는 '얼짱'이니 '몸짱'보다 '맘짱'이 앞서나갈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었다. <낭독의 발견>에서 나는, 욕심 없는 시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새해에는 하루에 시 한 편씩 소리내어 읽어보리라. 전철 안에서라도 좋고 마을버스 안에서라도 좋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여도 좋다. 나의 마음도 시를 따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아름다워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