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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이라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교통사고로 병실에 혼자 있을 때 간호사가 소염진통제를 주사해 주고는 "혼자 계셔서 심심하지 않으세요?"하고 물어오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하, 세상 읽을 시간도 모자란데 심심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심심하지도 않았지만 쓸쓸하지도 않았다.

▲ 곽재구가 엮고 쓴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앞표지
ⓒ 이가서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는 시 감상문집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앞글에다 시인의 쓸쓸하지 않음을 이렇게 서정적으로 고백했다.

길 위에서 오랫동안 사내는 생각했다. 시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시를 쓰는가. 바람이 불어오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꽃향기가 펄펄 날리는 지상의 길 위에서 사내는 그 질문들과 함께 행복했다. (중략) 어느 날엔 별 밭 속의 물이랑 위에 조각배 하나를 띄우고 생의 시간 속을 천천히 흐르며 지상 위의 길과 마을과 시장, 사막들과 산맥들, 호수들, 영화관과 악기점과 고서점, 엽서와 꽃과 인형을 파는 가게들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사내는 사내가 만난 모든 풍경들이 자신의 꿈과 사랑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노래를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살아가는 동안 서로 웃고, 울며, 어깨를 어루만져 주며, 술 마시고, 볼 비비며, 사랑하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봄날의 새 이파리와 같은 싱싱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한 사내는 길 위에서 단 한 순간도 쓸쓸하지 않았다. -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4~5쪽


시인이 머물렀던 길은 '갈대와 억새 지천으로 꽃 핀 863번 지방도로'라고 했다. 863번 지방도로는 어디쯤일까? 순천에 두 번 가본 적이 있고 여수에 두 번 가본 적이 있지만 863번 지방도로가 어딘지 나는 모른다. 시인의 글을 살펴보면 '와온과 달천 궁항을 지나 여수 바다에 이르는 작은 갯마을 길'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별 밭을 바라보기에 아주 좋은 곳인 모양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우리 시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자신이 만난 지상의 언어들이 하늘의 별 밭으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에는 우리 시대 시인들의 시 80편과, 그 시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시인의 서정적인 사색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80편 중 내 마음에 쏙 들어온 시 한 편, 고재종의 <파안>이다.

마을 주막에 나가서/단돈 오천원 내놓으니/소주 세 병에/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그걸 나눠 자시고/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허허허/큰 대접 받았네 그려!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86쪽


시인은 고재종 시인의 <파안>을 읽고서 자신의 부끄러운 사연을 떠올렸다.

시인 곽재구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신동엽창작기금과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과 기행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등이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다.
섬진강 변 군지촌정사의 사랑채에서 잠시 머물 때, 마을 노인들이 젊은이가 마을에 들어왔다고 퍽 좋아하셨다. (중략) 마을을 떠날 때 그분들에게 소주 한 병, 두부찌개 한 냄비 사드리지 못했다. -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87쪽

열대야 극복법 한 가지,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에 빠져 보는 일은 어떨까. 서민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 자체가 시원한 일일 뿐만 아니라, 서사성과 서정성을 공유한 뛰어난 시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시 여행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좋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곽재구 엮고 씀/2004년 11월 20일 이가서 펴냄/192×160mm양장/180쪽/값 8900원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평전 <배호 평전>, 생명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

곽재구 지음, 이가서(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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