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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절대 없다. 이렇다 할 광고도 없다. 선과 악을 선명하게 갈라놓는 갈등 구도도 없고,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관습적 로맨스 역시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심심하다'고 치부될 수 있는 '논픽션' 극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1년을 끌어오면서 소리 소문 없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MBC TV의 <실화극장- 죄와 벌>(이하 <죄와 벌>)이 그 주인공이다.

▲ 스타는 절대 없다. 이렇다 할 광고도 없다. 권선징악의 깔끔한 결론도 없고,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관습적 로맨스도 없다. MBC TV의 <실화극장- 죄와 벌>
ⓒ MBC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죄와 벌>은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여 재판 과정을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이다. 월요일 심야시간이라는 그리 좋지 못한 편성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통해 꾸준히 마니아들을 형성해 온 <죄와 벌>은 2005년 1월 3일 월요일에 93번째 방송을 맞이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는 '듀스 김성재 살인사건', '주병진 강간치상 사건'이나, 도무지 실제 사건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고동리 스캔들-성폭행 사건의 진실', '나는 내 딸을 죽이지 않았다-경기 **호텔 살인사건' 등을 다루어 온 <죄와 벌>은,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있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재판 결과와 피해자들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보듯이, 한 가지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을 각기 그대로 재현해주는 장면들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끝내 미결 사건으로 남거나 충분히 타당한 심증들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받는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담기도 하지만, <죄와 벌>이 주로 다루는 내용들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이 끝내 승리하는 악전고투 법정 투쟁기이다.

형평성을 잃은 법 집행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우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프로그램의 결론을 미디어가 포장한 현실의 판타지라고 치부할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죄와 벌>의 과정과 결론은 다분히 실제 사건과 자료들에 기초한 것들이며, 간간이 삽입되는 실제 사건의 피해자와 피의자들, 그리고 판사나 변호사, 검사들의 인터뷰는 극의 신뢰도에 큰 기여를 한다.

더군다나 무죄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매장 당해야 하는 피의자의 운명을 사족처럼 덧붙임으로써, 작금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 이 논픽션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죄와 벌>의 탄탄한 구성과 여태까지 이루어낸 소기의 성과에는 배우들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매번 달라지는 등장인물들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사건 변호인(이성용)과 검사(정욱, 신은정), 판사(김원배), 그리고 형사(양승걸)는 늘 같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데,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다.

▲ 각종 드라마와 CF의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어오던 배우들의 숨은 노력은 <죄와 벌>의 완성도에 큼지막한 방점을 찍는다.
ⓒ MBC
특히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 캐릭터로 굳어졌던 이성용씨는 <죄와 벌>을 통해서 억울한 용의자를 구제해내는 정의의 변호사로 열연하며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탈피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형사 역할의 양승걸씨는 짧은 등장 시간에도 불구하고 중독성 있는 눈빛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밖에 각종 드라마와 CF의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어오던 배우들의 숨은 노력은 <죄와 벌>의 완성도에 큼지막한 방점을 찍는다.

최근 한국의 드라마들이 세계적으로 '한류 바람'을 일으키며 승승장구 중이다. 하지만 채널을 아무리 돌려봐도 여전히 똑같은 얼굴들과 식상한 갈등구도들로 점철되어 있는 허울뿐인 '드라마 왕국'에서 <죄와 벌>의 존재감은 가히 경이로울 정도이다.

<죄와 벌>에서 한 회에도 수십 번씩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라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시시각각 진실로 대체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논픽션이 픽션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반증하는 것인가. 논픽션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드라마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이 영민한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 지속적으로 깊이있는 울림을 가져다주길 기원해마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방송: MBC TV 매주 월요일 밤 11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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