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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경장이 야구방망이를 폐기했다는 서초경찰서 쓰레기장.
C경장이 야구방망이를 폐기했다는 서초경찰서 쓰레기장. ⓒ 인권위 자료사진
구타에 쓴 야구방망이 임의 폐기

2003년 4월 12일 한 일간지 사회면 한 구석에 난 기사의 일부분이다. 사회면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도난사건 기사라 그냥 흘려 지나칠 만한 이 사건이 어느 날 ‘내게로 왔다’. 바로 이 기사에서 언급된 공문서 위조혐의로 구속된 정아무개씨의 지인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낸 것이다.

이 사건의 진정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쯤 지나 진정사건 피해자인 정씨는 서초경찰서에 참고인으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정씨는 절도용의자에게 위조신분증을 만들어 준 혐의로 조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C경장에게 야구방망이로 맞고 일명 원산폭격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것이다. 확보돼 있는 증거는 피해자의 허벅지에 남아 있는 멍과 원산폭격으로 생겼다는 정수리의 희미한 자국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사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당초 정씨가 주장한 구타 등 가혹행위 외에 또 다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진정인인 경찰관들이 피해자의 집에서 피해자의 물건 100여 점을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경찰서로 싣고 갔다는 점이다. 그 중 일부 물건은 임의로 폐기되기도 했다. 특히 정씨가 야구방망이로 맞았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C경장이 야구방망이를 임의로 폐기한 사실은 가혹행위에 대한 혐의를 짙게 했다. 더욱이 긴급체포 요건을 위반하며 긴급체포한 혐의도 추가됐다.

2003년 9월 중순, 서울구치소에 수용돼 있는 정씨를 면담했다. 현금도난 사건의 용의자는 정씨의 고향선배였는데, 사건 발생 직후 중국으로 출국해 검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씨는 용의자에게 타인의 신분증을 위조해 준 혐의를 받고 있었다.

진정을 내고 5개월이 지났음에도 정씨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찰관들에게 구타당한 그 사실보다는 그 뒤에 보인 경찰관들의 태도에 더욱 흥분해 있었다. 국가인권위에 진정한 이후 경찰관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기는커녕 구타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정씨의 주변 인물을 통해 진정을 취하하도록 회유하거나 협박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피진정인인 C경장은 구타 및 가혹행위 의혹과 조사관이 제기한 적법절차 문제 등 모든 것을 완강히 부인했다. 정씨의 멍이 왜 생겼는지 자신은 전혀 모르겠으며, 정씨의 집에 간 것도 정씨가 자발적으로 동의해서 갔다고 했다. 물건을 싣고 온 거며 버린 것도 모두 정씨가 동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다. 진정을 취하하기 위해 정씨를 회유하려 한 적도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진정인 정씨의 주장과 피진정인 C경장의 주장은 어느 하나 일치하는 게 없었다.

경찰, 주요 혐의 사실에 대해 “모른다”

결국 진실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좀 더 광범위한 증거 확보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다른 조사관의 도움을 받아 추가 자료 수집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실들이 확인됐다. 부여에 살고 있는 정씨의 처는 C경장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 진정을 취하하라는 얘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서울구치소의 접견기록에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씨의 선배가 정씨에게 국가인권위 진정 취하를 요구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경찰은 정씨의 집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물건 100여점을 경찰서로 싣고 갔다. 사진은 피해자 가족이 되돌려받는 과정에서 차에 물건을 실어 놓은 장면
경찰은 정씨의 집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물건 100여점을 경찰서로 싣고 갔다. 사진은 피해자 가족이 되돌려받는 과정에서 차에 물건을 실어 놓은 장면 ⓒ 인권위 자료사진
사건 조사에 착수한 지 석 달 정도 된 10월 말. 서울구치소에서 피진정인인 C경장과 피해자인 정씨를 모두 불러 대질조사를 벌였다. 두 사람의 주장은 여전히 엇갈렸다. C경장은 주요 혐의 사실에 대해 대부분 모른다거나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했다는 식으로 일관했다. 이에 정씨가 격분해 한때 두 사람이 주먹다짐 일보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11월엔 피진정인이 근무하는 서초경찰서를 방문해 피해자가 조사받았던 사무실과 유치장 등을 확인했다. C경장이 피해자의 멍든 허벅지를 찍은 사진이 다른 곳에서 찍은 엉뚱한 사진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주장해 사진 속 배경과 현장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었다. 대조 결과, 사진 속 배경과 실제 유치장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나 C경장의 발뺌도 여전했다. 경찰서에서 C경장은 “국가인권위 조사관이 범죄자인 정씨의 말만 듣고 정씨를 부추겨 사건을 만드는 것 아니냐”면서 이로 인해 자신이 괜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에 덧붙여 “그러한 사실에 대해 국가인권위 감사관실 등에 신고할 수 있는지”도 물어 보았다. 은근한 협박으로 들렸다.

사건 조사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정씨를 만났던 두 명의 변호사에게 당시 목격한 사실을 듣는 것으로 종결했다. 조사보고서를 작성한 후, 11월 말 소위원회에 이 사건을 상정했다. 소위원회는 사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를 전원위원회에 상정했다.

해를 넘겨 2004년 2월에 진행된 전원위원회에서는 피진정인 C경장을 출석시켜 직접 진술을 청취했다. 피진정인의 위법 행위에 대한 사건이고 또한 결과에 따라 피진정인의 신분에 큰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어 회의장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위원들의 질문에 C경장은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전원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확보된 여러 증거를 바탕으로 C경장을 가혹행위, 불법 압수·수색 및 긴급체포 요건 위반 혐의로 검찰총장에게 고발했다. 아울러 C경장의 이런 불법행위에 가담한 세 명의 경찰관 및 이들의 직속상관을 경찰청장에게 경고조치를 권고하기로 의결했다.

가해자, 피해자 상처 치유와 반성 필요

검찰총장에게 피진정인을 고발하긴 했으나 그 결과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담당 검사가 두 차례나 바뀌면서 사건처리가 늦어졌다. 그 사이에 경고조치를 권고한 네 명의 경찰관들에 대해서는 소속 기관장으로부터 계고조치가 있었다.

검찰총장에 고발 조치한 지 약 8개월이 흐른 지난 10월 말, 서울중앙지검으로부터 한 장의 고발사건 처리결과 통지서가 날아왔다. 국가인권위가 고발한 C경장(피의자)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에관한법률위반(독직폭행) 혐의로 정식재판을 청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특가법상 독직폭행은 벌금형이 없어 법원에서 무죄 또는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지 않는 한 경찰관의 신분을 잃게 된다.

한편으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도난 사건을 조사할 때 피해자를 대하는 과정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아니 나중에라도 솔직하게 잘못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더라면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하게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흔히 사람들은 처음 실수한 사실 그 자체보다는 나중에 그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더 큰 실수를 범하곤 한다.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기보다 회피하거나 그것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나 재력을 통해 무마하려 할 때 더 큰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과정을 비롯한 법 집행과정에서 인권 침해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부주의나 인권의식의 결여로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면 가해자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린 '조사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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