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소설 한 편이 나를 즐겁게 했다.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천명관씨의 작품 <고래>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창조적인 상상력의 소산이다.
대부분 문학작품이 본래 허구적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생생한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다. 사실 따져보면 우리나라 문학의 주류는 상상력과는 거리를 두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유신독재 등을 거치면서 우리들은 상상력을 자유로이 풀어낼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 시절, 문학은 시대의 증언이었으며 사회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뇌의 깊이를 재는 시금석이었다. 그도 아니면 자율적인 문학의 성채에 갇힌 순수한 그 무엇이었다. 요컨대 시대와 맞선 지사(志士)의 엄숙한 표정을 짓거나, 사회를 외면한 예술가의 창백한 얼굴을 띠었을 뿐이다.
1990년대 문학의 연장으로 근래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이 이러한 단선적인 전통을 깨면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가꿔오고 있다. <검은꽃>의 김영하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성석제가 비교적 널리 알려진 대표선수라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쓴 박민규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신예 맹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제 우리는 천명관이라는 늦깎이 신인을 한 명 더 세워둘 수 있게 되었다.
한국문학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성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이들 작가에게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그들의 작품이 단순한 제스처나 다소 억지스런 실험이 아니라 실로 새로운 감수성의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의 기대는 허망하지 않다.
내일의 우리 문학이 좀더 풍성해지는 데 있어 이들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은, 좀더 내밀하게 따질 때, 그들이야말로 상상력의 작가라는 사실에 있다.
상상력(imagination)은 무엇인가. 코울리지에 따를 때, 상상력은 정신과 자연을 연결시키는 힘이다. 감각과 지각 그리고 사상을 중개해 줌으로써, 일상적인 세계를 재구성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서로 무관한 것들을 그저 연결짓는 공상(fancy)과 달리,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처럼 현실의 숨겨져 있는 연관 위에서 낯선 것들을 묶어내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요는 상상력 또한 세계를 참되게 이해하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천명관의 <고래>를 창조적인 상상력의 소산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작품은 '평대'라는 가상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국밥집 노파 - 금복 - 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인의 인생을 그림으로써, 근대사회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 그 운명의 여울을 자유자재로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자유스러움은 인물의 형상화와 그들 운명의 설정에서 한껏 도드라진다. 라블레나 마르케스의 작품 세계에서처럼, <고래>의 인물들 또한 일상적 삶의 현상적인 모습에 갇히지 않는다. 그들은 예지 혹은 저주 능력을 갖추기도 하고, 강한 페로몬을 풍기기도 하며, 통뼈에 거인이거나, 둘이면서 하나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자이면서 남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과 이 시대의 표층과 이면이 다각도로 조명된다.
인물이나 사건, 배경 어느 측면에서도 작품의 의미소들이 단일한 체계를 이루지는 않는다. 사회의 각 부면과 삶의 각 국면·층위에 대한 통찰들이 서로 자유롭게 부유하면서, 틈을 가진 전체 구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문체 또한 이러한 상태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 때로는 분석적이고 냉철하지만, 때로는 구수한 입담을 풀어내며 해학과 풍자의 세계를 창출하고 또 때로는 가녀릴 대로 가녀린 섬세한 면모를 보인다. 인물의 다성성이 그리 아쉽지 않을 만큼, 서술자의 능란한 말솜씨가 넘쳐남으로써 읽는 재미까지 확보해준다.
전체적으로 <고래>는, 실제의 우리 현실이 그러한 것처럼,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그 구조의 주제효과 속에는, 우리 근대사의 암울한 면모도 녹아 있고, 탈근대를 운위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가 소중히 보듬어야 할 내면의 가치도 황금빛으로 그려져 있다. '고래'에 대한 동경과 '개망초'에 대한 애정의 편폭 속에서, 단순한 알레고리를 넘어서 우리들의 삶을 구조화해주는 것이다.
<고래>가 보여주는 이러한 면모, 현실을 풍요롭게 환기시키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역사와 삶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이러한 성취야말로, 창조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발전을 꿈꿀 수 있는 주요한 항목을 하나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 1월 12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