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노인 둘이 설탕물인지 커피인지 모를 들쩍지근한 차를 앞에 두고 언필칭 '빨간 영화'를 본다. 아무리 나이 들었어도 남녀가 유별한진데 오가는 둘의 대화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다. 심지어는 포르노테이프를 틀어놓고 '청춘가'의 한 대목까지 불러제낀다.
"미국놈들은 X도 크다더니 저~ 저기 저 놈 좀 보소."
"저놈들은 저거 하는 게 일이라네요."
"별노무 직업도 다 있네. 그것 참. 잘도 허네."
신작 소설집 <청춘가를 불러요>(한겨레신문사)에서 한창훈은 가히 절(絶)에 달한 입담과 능청을 보여준다. 책을 읽노라면 포르노를 보며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는 두 노인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고, '민망'보다는 '훈훈함'이 먼저 독자들의 몸을 감싼다. 그 자신이 존경과 헌사를 바쳐마지 않았던 선배 소설가 이문구(작고)의 구어체에 필적한다 말해도 누구도 반론을 내놓지 못할 경지다.
<청춘가를 불러요>에 실린 10편의 단편들은 제 각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아름답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되는 공통점을 갖췄다.
바닷가 마을 한 아낙의 인생유전을 담담하게 그려낸 '여인', 가슴 열어 러시아 창녀를 감싸 안는 식당주인 이야기 '복국 끓이는 여자', 떠돌이 여인의 출몰과 사라짐을 통해 독자들의 가슴을 허허롭게 만드는 '이제 그곳에는 봉네가 없다' 등이 그중 걸출하다.
1963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난 한창훈은 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장편 <홍합>으로 제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료작가 심상대는 "고향 집 안방에서 맏누이와 겸상하여 먹는 백반처럼 담박소쇄하다"고 한창훈의 문장을 평했다. 기가 막힌 그의 지적에 기자 역시 동의한다.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생각
장정일 산문집 <생각>
소재와 표현 면에서 그야말로 '파격적인'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출간해 한국사회를 논란 속에 빠뜨린 바 있는 소설가(그는 시도 '잘' 쓴다) 장정일이 남들과는 다른 시선에서 세상과 인간을 관찰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산문집 <생각>(행복한책읽기).
책은 크게 다섯 개의 꼭지로 분류되어 있는데 자유로운 주제로 자유롭게 쓴 '아무 뜻도 없어요'가 특히 눈에 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만화가 이현세가 이회창씨와 관련된 만화를 그리자,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고, DJ DOC 이하늘과 여성 댄스그룹 베이비복스의 논쟁에서 여전히 이 땅을 횡행하는 '남근주의의 그늘'을 보고 이를 질책한다.
책에서는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반가워할 해외 문화행사 참석요청과 원고청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장정일의 특이한 취향(?)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잘난 척'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 하지만, 요새처럼 자존심과 원칙이 무너진 세상에서 작가적 자존심과 글쓰기의 원칙을 엄격하리 만치 지키고 사는 그의 태도는 귀하게 대접받을 만하다.
최근엔 거의 시를 발표하지 않던 그가 '검은색 통굽 구두'란 제목의 연작시 6편을 실은 것도 이채롭다. 영화팬들이라면 장정일의 영화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전영잡감'에도 주목할 듯하다. 아래 그가 출판사에 보낸 편지 중 하나를 전문 인용한다.
안녕하세요. 장정일입니다.
귀사가 기획하신 <꼭 읽어야 할 시 369>에 제 작품을 선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제 시는 '꼭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수록을 절대 거절합니다.
| | 한줄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
| | | | ⓒ이룸 | 김원일 연작소설집 <푸른 혼>(이룸)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박정희 유신독재의 악랄함을 상징하는 '사법살인'이란 조어를 만들어내게 한 인혁당 사건.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현대문학상과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원로작가 김원일이 소설로 복원시킨 '슬픔의 역사'를 만난다. 동시에 떠오르는 질문 하나. 우리는 광기의 시대를 온전히 건너왔는가?
이청준 산문집 <마음 비우기>(이가서)
대문장가 이청춘이 만난 11명의 예술가. 그들은 어떤 꿈을 꾸며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김선두 화백의 그림이 책의 품격을 더한다.
볼프 본드라체크의 <첼로 마라>(생각의나무)
명품은 어떻게 탄생하고, 그 가치는 무엇을 통해 얻어지는가. 60억원을 호가하는 명기(名器) '첼로 마라'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김홍근의 <보르헤스 문학 전기>(솔출판사)
미셀 푸코로 하여금 "지금까지 간직해온 내 사고의 전 지평을 완전히 바꿔버렸다"란 찬탄을 자아내게 한 아르헨티나의 거장 루이스 보르헤스의 삶과 기쁘게 만난다. 어디선가 탱고리듬이 들린다.
마이크 곤살레스의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책갈피)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쿠바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 혁명을 꿈꾸는 전세계 청년들의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는 게바라의 삶과 죽음이 격정적으로 서술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