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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동안 고향인 강원도 원주를 거의 떠난 적이 없던 사람, 스스로의 손으로 책 한 권 남기지 않았던 사람, 돈벌이를 위한 변변한 직업 한 번 가져 보지 못한 사람, 그러면서도 오늘날까지 숱한 사람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조한알(一粟子)이라는 아호를 지닌 장일순(1928~1994)이다.

시인 김지하, 이현주 목사, 판화가 이철수, <아침이슬>의 김민기, 리영희 교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등 이름만 들어봐도 금방 알만한 쟁쟁한 문사(文士)들이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일순을 스승으로, 아버지로,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으로, 단 한 분의 선생님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좁쌀 한알> 책 표지
ⓒ 정병진
그렇다고 꼭 이렇게 이름난 사람들만 장일순을 존경하고 따랐던 것은 물론 아니다. 장일순의 집에는 일 년 내내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장군, 시장, 국회의원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고 주부, 목수, 농부, 직장인 같은 평민들도 많았다. 장일순은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누구나 차별 없이 즐겨 반갑게 맞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손님을 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하나님처럼 잘 모셨던 것이다. 심지어는 병상에서 암으로 투병생활을 할 때까지도,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환자인 장일순을 걱정하기보다는 두어 시간씩이나 자신들의 푸념만 잔뜩 늘어놓고 가도 그는 일절 성가시다는 내색 한 번 없었단다. 철저히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랬으니 장일순을 만나 감화 받지 않고 배겨날 사람도 무척 드물었으리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던 ‘원주 캠프’를 이끌었던 실질적 주역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종래의 정치 투쟁 일변도만으로는 진정한 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활 및 생명운동으로 전환을 꾀한다.

그러면서 땅과 먹을거리를 살리기 위한 도농직거래 운동인 ‘한 살림 운동’을 처음 시작하였고, 그 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아보면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장일순은 근래까지도 일반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지도자였다. 왜 그랬을까?

지난 독재정권들은 장일순을 요주의 인물로 꼽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제한을 가하고자 했다. 아마도 이런 폭압적 상황이 장일순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정치 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일순 스스로가 노자의 무의(無爲)의 도를 실천하여 도무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장일순은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책을 남긴 적이 없고, 죽기 전에도 자기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을 ‘좁쌀 한 알’ ‘건달’로 부르기마저 주저하지 않을 만큼 겸손한 그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장일순을 마음 속 깊이 흠모하고 기리려 하는 사람들은 선생이 보여준 훌륭한 삶의 자취를 널리 소개하고 나누고자 했다. 그래서 타계 10주기를 맞아 생태운동가 최성현씨의 손을 통해 이 책을 펴냈다. 장일순과 얽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주로 취재하여 그의 서화와 함께 엮은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따뜻한 감동을 주는 건 물론이고 빼어난 서화 감상을 동시에 누릴 수 있기에 애지중지하며 곁에 두고 볼만하다. 특히 유명인사 보다는 무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겪은 일화가 많이 소개되고 있어 장일순의 인간적인 면모와 체취를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삶의 좌표를 잃고 힘겨워 할 때, 사람다운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가만히 펼쳐 천천히 다시 새겨 봐도 좋을 책이다.

일찍이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벌써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세우기 위한 원 월드 운동에 동참하였다.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하여, 강원도 원주에 앉아서도 세계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전 한양대 리영희 교수 같은 사람까지도 자주 놀래게 만들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장일순은 서구사상의 흐름에 해박했으나, 이것을 결코 티내는 법이 없었고 철저히 소화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올곧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와 사상의 근저에는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영향이 매우 컸다. 최시형을 발견하고서 그는 들뿌리 백성들을 하늘처럼 섬기게 되었고 나락 한 톨이나 풀 한 포기에도 대우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펴내는 김종철 교수는, 최시형 선생이나 동학사상을 복원하여 오늘날 가장 필요한 실천적 삶의 원리로 살려냈다는 점에 장일순 선생의 커다란 공로가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 적 있다.

정현경 교수와 대담에서 장일순은 ‘주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닦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혼자 산보를 해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술도 많이 먹었어요. 술 몇 잔 얻어먹고 나서 돌아올 때는 꼭 방축으로 걸어서 오지요. 그래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는구나”하는 감사도 하고, 또 “내가 이러이러한 허튼 소리를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하고 반성도 합니다. “네 자신이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구나”하면서요.

또 하나는 돌 틈에 끼어서 짓밟혀 있으면서도 풀이 턱 버티고 서있는 걸 보잖아요. 풀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있고 주야로 태양과 달을 의연히 맞이한다 이 말이야. 그 하나의 모습마저도 내가 못 미치거든요. 걸어오면서 내 마음을 씻는다고 할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길가에 짓밟힌 풀들이야말로 자신의 위대한 스승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밥 한 사발만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평생 배워 아는 것이 밥 한 사발을 아는 것만 못하다”는 해월의 가르침도 이런 장일순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소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장일순은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가 솔로몬의 모든 영화를 능가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다.

“솔로몬이 누린 영화는 메카닌 시스템(기계, 자금, 건물, 욕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언젠가는 다 쓰레기가 돼버린다. 그에 견주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는 바이오 시스템이라 살아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지만 하늘과 소통을 하고 있고, 또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영원하지. 차원이 다른 거라.”

장일순이 가장 강조해 마지않았던 것 중 하나가 “자신을 낮추고 남을 공경하고 높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닥으로 기어라”는 말을 곧잘 했고 이를 몸소 실천하려 애썼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이 책에 수두룩하다. 원주역 소매치기를 정성껏 대접한 이야기, 감옥에서 잡범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이야기, 흙길에서 제자 앞에 납작 엎드려 절한 이야기 등 모두가 하심(下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일화들이다.

천지간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보듬어 안을 때라야 비로소 세상이 변한다고 장일순은 힘주어 가르쳤다. 유홍준에 의해 “우리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文人畵家)”로 평가되는 그는 빼어난 글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상징하는 난초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런데 그 난초를 가지고 나중에는 웃고 명상하는 사람 얼굴을 그려냈다. 깊은 산속에 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가는 난초처럼 살라는 걸까?

덧붙이는 글 | *월간 <새가정>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도솔(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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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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