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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고2 때(1963)
ⓒ 박도
산골마을에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올 겨울 들어 그동안 눈이 내리지 않아서 언저리 산하가 메말라 산골사람들을 애태웠는데 나흘 전 하룻밤 새 내린 눈은 한꺼번에 겨울 가뭄을 해소시켰다. 사람이 저 잘난 양 만용을 부리지만 자연의 위력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

흔히들 창작을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들 하는데, 요즘 나는 쓰던 글이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깊은 늪에 빠져있는 기분이다. 내 평생을 바쳐 걸어온 길이 잘못 든 게 아닐까 몹시 흔들리고 있다.

그림이 안 되자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제 귀마저 자른 빈센트 반 고흐가 이해된다. 여기다가 보름 전 한 친구의 비보를 듣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친구를 생각할수록 내가 염치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절의 친구들

가난은 몸서리나고 지긋지긋하지만 그 시절에 만난 사람은 늘 아름답고 순수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 무슨 조화인가.

조선조 제25대 철종 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강화도의 한 초동(樵童;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임금이 되어 대궐로 들어가서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에 둘러싸였으나, 철종 임금은 나무꾼 시절의 ‘복녀’라는 처녀를 두고두고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복녀에게 느낀 순수함 때문이리라.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한 대통령은 가난한 어린시절에 어머니가 만들어준 쇠비름나물과 칼국수의 맛을 못 잊어 청와대 주인이 된 후에도 즐겨 찾았다. 하지만 그것을 청와대 주방에서는 제 맛을 내지 못해 고향의 형수가 이따금 만들어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사람은 대체로 가난한 시절에 만났던 사람과 음식은 평생을 두고 못 잊나 보다.

내 지난 삶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고교 때였다. 중도에 경제적인 사정으로 1년을 쉬기까지 하였으니 남보다 더 긴 고교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가장 새록새록 돋아나고 그때 만난 친구들이 정답게 다가온다. 혼자서 눈밭을 헤매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고교시절의 숱한 친구들 가운데 짝이었던 친구 이야기를 두드려 본다.

소설보다 더한 기막힌 인연

▲ 고1 때 짝 이건규군(왼쪽)과 종묘에서(1963년)
ⓒ 박도
'짝'이란 "둘이 서로 어울리어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는 것"이라고 사전에 풀이하고 있다. 짝 중에도 "매우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를 단짝이라 하고 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는데 학창시절 한 반에서 그것도 짝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연(緣)이다. 그 짝 가운데 서로 잘 어울리어 단짝이 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1961년 고교에 입학하였다가 가정 형편으로 휴학 후 1962년 복교한 그해 고1 때 짝은 이건규군이었다. 그는 다소 개성이 강한 친구로 '예스와 노'가 아주 분명하고, 한 번 눈에 벗어나면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는 친구로, 한겨울에도 꼭 찬물만 마셨다.

내가 복학은 했지만, 곧 거처 때문에 난처함을 그가 알아차리고 주저 없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그의 집은 부자가 아니라 홀어머니가 동대문시장 노점에서 떡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다급했고, 그의 호의가 고마워 그 친구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의 집을 떠난 뒤에도 잠자리가 불편하면 아무 때나 대문을 두드렸던 친구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섬기며 지냈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오래 일하다가 퇴직한 뒤 어머니의 터전이었던 동대문시장에서 지금은 비단 장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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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신문배달을 했는데, 우리 반 반장이었던 노진덕군과 또 다른 옆 자리 구본우군이 나에게 신문배달 자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그 청을 들어줬다. 그래서 그 무렵 우리는 동아일보 세종로보급소 내에서 '중동고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노진덕군은 해군제독으로 예편하여 지금 삽교호 함상공원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구본우군은 도로공사를 일찍 퇴직한 뒤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서 요즘은 봉천동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 고2때 단짝 친구 이용호군. 졸업할 때 서로 평생 잊지 말자고 나누어 가진 사진이다.
ⓒ 박도
고2 때 단짝 이용호군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다. 그는 주말이면 자주 흑석동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영양보충을 시켜줬으며, 대학 다닐 때는 사돈집을 가정교사로 연결시켜줘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소식을 까마득히 몰랐는데 지난 1월 31일 <오마이뉴스>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기사가 나가자, 찾았던 양철웅 친구의 운명 소식과 함께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인도한 친구가 이용호군이라는 기막힌 인연에 놀랐다.

그는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소설에 고1 때 짝의 죽음에 고2 때 짝이 먼 이국 뉴욕에서 인도했다고 쓰면 고대소설 쓴다고 할 게다. 아무튼 그의 소식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내 뒷자리에 앉았던 한의수군은 한때 내가 도시락을 싸가지 않자 아무도 몰래 내 책상서랍에다 빵 봉지를 넣어주었던 친구다. 고교 졸업 후 그의 거처를 모르는데 일찍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의 집은 혜화동이었고, 별명은 두꺼비였다.

그리고 호른을 부르던 밴드부 윤기호군, 우리 반 천재 이관세군도 잊을 수 없는 친구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재작년에 윤기호군을 따라 일본까지 가서 그 덕분에 <일본기행>이라는 책도 썼다. 그는 그동안 양천구청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뒤 백수로 지낸다더니 최근에 기사로 취업해서 일하고 있고, 이관세군은 인천 시민방사선과병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텍사스반’의 개성 있는 친구들

고3 때 우리 반은 '날나리반', '텍사스반'이라고 하여 개성 있는 친구들의 집합소였다. 아이스하키반 수구반 밴드반 연극반 친구들의 집합소로 담임선생님을 무던히 속 썩였다. 학년 초 우리를 기도로 훈계하시던 선생님에게 마침내 몽둥이를 들게 하였다.

그때 내 짝은 염동연군이었는데, 그는 나보다 번호가 10번 이상은 앞이었는데도 굳이 뒤로 와서 짝을 하자고 했다. 그는 전남 보성 양조장집 아들로 동생들과 함께 시골에서 유학 와서 경기고교 앞에다가 집을 마련하여 지냈는데 내 온갖 잡부금은 그 친구가 알아서 내주고 걸핏하면 자기 집으로 데려 갔다.

▲ 고3때 짝 염동연군, 그때 우리는 공부보다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 박도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그 친구와 이불 봇짐을 싸들고 마무리 공부한다고 바닷가 외딴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공부보다 이야기를 더 많이 해서 그 친구가 이듬해 대학에 진학한 게 내 잘못 같아서 지금도 미안하다.

그는 그때부터 영남의 친구를 더 좋아했는데 그 탓인지 지난 대선 때 영남 출신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참모 역을 잘 수행하였고,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나랏일을 하면서도 당내 화합과 지역 문제 해소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사람의 인성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닌가 보다. 그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으나 여태 후원금 한 번 보내지 못했다.

'텍사스반'의 보안관 최창혁군은 원조 청진동 해장국집 아들로 재학시절 연극공연에서 인민군 장교 역을 기똥차게 잘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지금도 청진동 터줏대감으로 옛 골목을 지키고 있다.

옆 반의 조중연군은 나의 고교 대학 동창으로 한때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역임했으나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해설가로 축구행정가로 더 능력을 발휘하였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대한축구협회 전무로 '4강 신화'의 숨은 공로자다.

고교 졸업 후 옛 친구들과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니까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지는 못해도 그 시절을 생각하고 그리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내가 좋은 작품을 쓰기 기원할 것이다. 나는 그때 그들의 촉망받았던 학생 작가였으니까.

눈 내리는 날 산골마을에 홀로 앉아 그들을 그리며 조용필의 '친구여'를 흥얼거린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 했지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 어디에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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