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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짜에요?"

“아빠 저 표지판 보니까 이 길은 아까 지나간 것 같은데...”

한밤중의 엄청난 폭우다. 창닦이를 가장 빠른 속도로 해 놓았지만 소용이 없다. 다니는 차도 한대 없고 가로등도, 인가도 없다. 길은 굴곡이 너무 심해 갑자기 우로 좌로 급커브가 되어, 거의 기어가는 수준인데도 식은 땀이 흐른다. 차를 길가에 댔다. 이런 날씨에는 길가에 차를 댈 때도 차선에서 완전히 빼 놓아야지 잘못하면 뒷차에 들이받히는 수가 있다.

양동이로 쏟아 붓는 형국이니 창문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왔다갔다 하는 창닦이 사이로 보이는 암흑은 도저히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이상하게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니가 아까 왔던 길이라고 확인을 한 것이다.

▲ 뮌헨 시청
ⓒ 유원진
갑자기 오스트리아의 산 속에서 눈오는 날 같은 길을 밤새 돌다가 폭설 속에 갇혀 얼어 죽었다는 얘기가 떠오르며 덥지도 않은데 땀이 흐른다. 그런데 그게 실화였던가, 영화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난다. 갈림길도 없었는데 왜 계속 같은 곳을 돌고 있을까. 어두워지는데 고속도로를 벗어나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 이건 완전히 귀곡산장이네요. 너무 으스스하다.”
“왜 안가?”

아내의 목소리에는 방금 아들이 말한 귀곡산장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잠깐 쉬었다 가자. 비가 너무 와서 앞이 잘 안 보여.”
“다른 데로 가서 쉬면 안돼? 여긴 너무 기분 나쁘다. 산속 한가운데 잖아?”
“차 안인데 어때. 조금 덜 오면 가자. 계속 이렇게야 오겠어? ”

무서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귀곡산장인지 뭔지 그런 류로 무서운 게 아니고 자꾸 머리를 이상하게 깎고(스킨 헤드족이라고 하나?) 나치 문양을 머리에 새긴 근육질의 청년들이 떠올려지는 게, 아닌 말로 강도라도 당할까봐 걱정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코카서스 인종을 제외한 다른 인종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한다는, 사실인지 헛소문인지 알 수 없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그들이 어디 파티에라도 갔다 술 취해 오다가 우리들을 보고 시비를 걸지 않을까 하는, 영화의 한장면을 실제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하여튼 영화를 너무 많이 봐도 탈이다).

프라하 가려다 귀곡산장 만나겠네

부르게를 떠나면서 원래는 형식적으로 짜놓은 것이긴 하지만 베를린을 가려고 했는데 하루에 가기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중간에 하노버를 들리려니 숙박 정보가 없어서 방향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과 뉘른베르그로 틀었다. 프랑크푸르트 캠핑장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출력해 가지고 있었고 뉘른베르그에는 성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유스호스텔 이야기가 여러 책자에 나오는데 아주 흥미가 있어서 하루 묵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길들은 로마 아닌 프라하로 가는 길이었다. 다른 모든 곳보다도 왜 그리 프라하가 가고 싶었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막연하게 그곳에 가면 유럽의 가장 진한 냄새를 맡고 가장 진한 색깔과 역사가 뿌려 놓은 유럽의 가장 진솔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프라하의 봄'으로 대변되는 한 시대의 갈망이 그 광장이나 골목 귀퉁이 어딘가에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고 치러 간 꼴이 되긴 했지만….

부루게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속도로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유럽의 고속도로는 중간 중간에 고속도로휴게소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휴식과 식사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는 테이블과 식수가 준비되어 있고 쓰레기통도 있어서 여행하다가 식사를 한다든지 자동차 정리를 하기가 아주 좋다. 움직이면 쓰레기라더니 한나절만 실내 청소를 하지 않아도 엉망이 된다. 별로 많이 걷지도 않는데 담배를 끊어서인지 끊임없이 무엇이 먹고 싶어서 늘 과자나 빵 봉지들이 어지럽다. 그래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담배를 끊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늘 아침에 밥을 충분히 해서 점심까지 먹었는데 다니다가 밥 먹는 데는 전혀 불편이 없다. 심지어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에펠탑 옆에서도 여기저기 도시락을 꺼내 놓고(서양인들 도시락이래야 샌드위치하고 콜라 정도지만) 먹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한국식은 반찬을 여러 가지 해놓고 먹는 형태라 우리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주로 김밥이나 비빔밥 등으로 미리 준비했다가 먹었다. 유럽여행 내내 어디 앉아 먹을 데가 없어서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점심 후 앉아서 쉬다가 아들을 불러서 베를린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독일의 수도이고 부란덴부르크 문을 보고 싶을 뿐 꼭 가고 싶은 건 아니란다. 큰 아이도 같은 생각이어서 둘째와 지도를 놓고 프라하까지의 길을 뒤지기 시작했다. 베를린으로 가면 너무 멀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와 뉘른베르그로 변경했다.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프랑크푸르트의 캠핑장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고속도로를 갈아타려고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헤매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만 것이다. 부루게에서 출발할 때부터 방향을 잡았으면 이런 낭패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빗줄기가 조금 그만 약해진 것 같다. 필자는 실내등을 켜 놓고 아들에게 어디쯤인 것 같으냐고 물었다. 꼬마 항해사는 지도를 펴더니 아까 여기를 지났는데 지금 이 근처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으니 프랑크푸르트와 가깝다고 자신있게 얘기한다. 나는 눈도 잘 안 보이고 국도는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모르겠다.

“그럼 어차피 프랑크푸르트에 가도 비는 올 것이고 빗속에서 텐트 치고 짐 내리기도 쉽지 않을테니 노숙 아닌 차숙을 하는 게 어떨까?”
“좋아요 아빠! 재미 있겠다.”
“그래, 예니 아빠. 하루쯤이야 뭐. 돈 굳었네”
“아버지만 불편하시지 않으면 돼요.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팀장 할맛 난다.

캠핑도 아니고 노숙도 아니고 '차숙'은 뭔가?

“그래도 여기는 좀 그렇다. 천천히 민가를 찾아 보자. 아무래도 주택가가 이런 산중보다는 안전하지 않겠어?”

하여튼 차숙을 하기로 결정을 하자 맘이 느긋해지면서 차창 밖의 어둠도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침착해지자 길도 훨씬 잘 보였고, 곧 동네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옆으로 나가는 길을 폭우 때문에 못 보고 계속 그 동네를 밖으로 커다랗게 돌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동네 입구에서 조금 아래로 비포장 길을 내려가니 조그마한 공터가 나왔는데 통나무로 지은 집들과 현대식 집들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공터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 사이로 차를 세웠다. 휴양지 같기도 하고 산골동네 같기도 한 여러 채의 집들이 빗속에서 독일의 색깔만큼이나 우중충하게 서 있었다.

실내등을 켜고 좁기는 하지만 시끌벅적하게 잠자리를 준비하는데 누가 차창을 두드린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밖에는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노인 한 사람과 청년이 서 있는 걸 보고 우선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나이 터울이 많은 강도팀도 없겠지만 둘다 스킨헤드는커녕 필자보다 더 순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내 얘기를 듣더니 공터를 가로질러 빈 집이 있는데 쉬어가도 좋다고 말한다. 사양하고 여기에서 자도 안전하겠느냐만 물었다. 빙긋이 웃더니 이 청년이 아들인데 바로 옆이 집이니 아무 걱정 말고 자고 가라고 한다. 가만히 보니 그 집 안마당이 아닌가. 아침에 밥을 해먹어야 하는데 물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얼마든지 쓰라고 한다.

사례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나는 캠핑장 일박 비용의 절반 정도를 내놓으며 받아야 내 맘이 편하겠다고 하자 웃으면서 받았다. 나로서는 안전 확보 비용인 셈이다. 아무래도 신경을 더 쓸 것이 아닌가. 그 노인도 필자의 맘을 눈치 챘는지 조용한 마을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를 한다. 귀곡산장도 조용하기는 하지. 우리는 우리 차가 귀곡산장이라며 서로 귀신 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었다.

지금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산속마을에 깔려 있던 안개를 생각한다. 그 평화와 고요함을 떠올리면서 비록 불편했던 잠자리였지만 그 깊은 산속에서 자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침을 해먹고 떠나려 하자 어제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옆집의 다른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라고 이것저것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 또한 답례로 기념품을 주었는데 한국 사람은 처음 본다며 아주 기뻐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그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그는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바로 조금 전 처음 본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그리고 가 보지 못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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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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