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사명대사가 일본 방문시 일본의 굴욕적인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일본군이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도열해 앉아 있으며 일본을 방문한 일행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군의 병기를 도끼로 해체해 불태우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후인 1604년 8월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었으며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 3500여명을 인솔해 이듬해 4월에 귀국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벽화로 그려진 <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일본에게는 치욕적인 벽화이다.
문화재위원들은 일본에게는 치욕적인 벽화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유지됐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나타냈다. 일제치하에서 이 벽화가 발견되었다면 조기에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24일 조사연구 지도위원회 회의에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는 “일본군이 사명대사에게 항복하는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기막힌 그림이다. 현실적으로 다시 없는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얘기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라고 평가하며 “신륵사의 벽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그려졌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개칠을 통해 부분적으로 변형되었으나 개칠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그대로 담고 있어 신륵사의 성격 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륵사 극락전의 단청과 벽화는 1805년 전ㆍ후에 시공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개ㆍ보채작업이 진행됐으며 136폭의 벽화와 140매의 단청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함께 극락전의 외벽에 걸려 있는 <신륵사중수기>는 ‘1960년에 중수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번 연구조사의 책임조사원을 맡은 권현규(충북 무형문화재 단청장 제9호) 장인은 “단청과 벽화를 개ㆍ보채한 경우 원형 복원이 전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처음 개채한 화원이 그 이전까지 보존되어오던 유적의 진가를 인정해서인지 원형을 유지하기위해 애쓴 흔적이 벽화의 곳곳에 남아있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에서 아쉬운 점은 개칠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어 일본군의 표현 등이 임진왜란 당시의 복식(服飾)이 아닌 근대적인 복식을 갖추고 있다. 비록 상당부분 원형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당시 우리 민중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시한 면이 있다”라고 조사 의견을 밝혔다.
이어 그는 시공시기와 작자에 대해 “1805년경 신겸스님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추가적인 조사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시의회는 25일 성명서를 통해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는 명백한 일본 땅’이라며 독도망언을 자행한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강제 추방하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앞서 시마네현 의회는 지난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제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