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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태
내가 괜찮겠느냐고 묻자,

"피곤하면 남들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아니면 여학생 휴게실에 가서 조금 눈을 붙이지요 뭐."

그러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면 되겠다 싶어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우리는 학생회관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다음에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9시 30분쯤인가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봤더니, 어느 학생이 교수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출출했는지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나보다.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처럼 컵라면이 없던 시대라서 커피포트를 이용하여 라면을 끓여먹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만 물이 끓어 넘치는 줄 모르고 있다가 합선으로 정전 사태를 빚은 것이다. 언젠가 한 번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 경비아저씨가 퓨즈를 바꾸어 끼어 바로 불이 들어오게 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경비아저씨가 두꺼비집을 이리저리 손을 보더니 도저히 자기 실력으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곳이 합선이 되었는지 퓨즈를 바꾸어 끼면 바꾸어 끼는 대로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항의를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벌써 밤 10시를 넘기고 있어 한전에 연락해도 사람이 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와 남학생 몇몇이 아저씨를 따라 손전등을 들고 합선된 부분을 찾아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포기하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곳에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천안으로 가는 버스는 막차가 8시니 벌써 차가 끊긴 뒤였다. 내 머릿속도 정전이 된 것처럼 캄캄했다. 환하게 불을 밝히던 중앙도서관도 어둠 속으로 그 위용을 감추었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모두 교문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택시를 잡아타고 천안까지 가든지, 아니면 고모님댁으로 가서 하루 신세를 지든지…."

겨우 머리를 굴려 생각한 나의 방법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철민씨 집으로 가요."
"뭐? 우리 집으로!"

정색하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왜, 안돼요?"
"그건, 아니지만…."
"가요. 어때요. 어차피 우리 밤 새워 공부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면서 그녀가 앞장서서 가는 것이었다. 딱히 다른 방법도 없고 해서 나도 뒤를 따랐다. 우리는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에 들러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과일 몇 개를 샀다. 나의 자취방으로 온 우리는 나는 나의 책상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녀는 내가 식탁으로 쓰는 접는 상 위에 책을 펼치고 공부를 하였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공부가 잘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책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한 부분만 반복하여 읽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조금 자고 일어나 공부를 하는 편이 효율적일 것 같았다. 예의상 그녀에게 먼저 눈을 붙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괜찮다며 자기를 개의치 말고 피곤하면 조금 자고 일어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새벽에 깨워주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방바닥에 담요를 깔고 베개를 놓은 다음 누웠다.

그러자 그녀가 아무리 여름이지만 감기 든다며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가 이불 끝을 잡아 내 목 있는 부분까지 가져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바로 나의 얼굴 위에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그녀가,

"엄마!"

하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어나 앉으면서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녀도 순순히 내 입술을 받아주었다. 감미로운 키스였다. 지난 겨울 덕유산 등반에서 첫 키스를 해본 이후 두 번째였다.

나는 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녀를 눕힌 다음 그녀의 상의 단추를 열기 시작했다. 단추가 거의 열리자 그녀의 속옷 안에서 봉긋한 두 가슴이 튀어 나왔다.

"안돼요! 철민씨, 이러지 마세요."
"어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고, 또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데."
"그래도 아직은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괜찮다니까."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런데 저항하던 그녀가 갑자기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방에 다시 들어온 나는 말도 못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눈물을 그친 그녀가 내게 화를 내기는커녕 천만 뜻밖에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공부하던 노트 한쪽에 무어라고 적더니 그걸 찢어 주었다. 거기에는 예쁜 글씨로 그렇게 씌어 있었다.

"나도 철민씨를 너무 너무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하지만 우리 결혼 전까지는 우리의 사랑을 아껴요. 저는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첫 날밤, 우리의 침실을 핑크빛으로 꽃 피우기를 원해요."

그녀의 재치? 지혜? 하여튼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에 감동, 감격한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고 보듬어 주었다. 아까와 같은 동물적 본능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사랑의 마음으로.

아마 소설 '벙어리 삼룡'과 별의 '목동'이 이런 심정으로 여주인공들을 지켜주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를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물빛사랑 1

떨어지면 마음이 병나고
함께 있으면 몸이 병난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6회에서 계속됩니다.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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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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