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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큰 형이 찍은 동호해수욕장의 해넘이
ⓒ 박종인
바다는 사르르 옷섶을 풀어 시나브로 제 알몸을 드러낸다. 칠렁거리며 밀려와 연신 뭍에 기어오르는 바닷물은, 실은 슬그머니 뒷걸음치는 썰물이다.

물이 빠진 벌거숭이 앞바다의 살갗이 참 보드랍다. 거기엔 백합(白蛤)이 산다. 맛이 산다. 갯지렁이가 산다. 바다가 팔을 걷어붙이고 두 팔을 벌리면 아이들이 그 아름에 안긴다. 아이는 바다의 품안에서 더 어린 아이로 변해간다. 개펄은 아기집(子宮)처럼 질펀하고 촉촉하다. 실은 아기집이 작은 바다이다.

먼바다에서 다시 메밀꽃을 일며 밀물이 밀려오면 아이들도 다시 뭍으로 나온다. 주섬주섬 옷을 입은 바다는 옷고름을 맨다. 바다는 날마다 옷맵시를 꾸미며 알까기를 한다. 펄 안에는 수많은 죽살이가 있다. 바다는 삶의 뿌리이자 바탕이다. 하루의 해도 바다에서 나서 바다에서 진다.

서해는 동해보다 더 진솔하다. 동해는 조금 때의 썰물에도 좀체 숨은여(暗礁)를 드러내지 않지만, 서해는 사리 때도 알섬의 뿌리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동해바다가 품을 감추려드는 수줍은 처녀라면 서해바다는 아이를 위해 감출게 없는 엄마이다.

자신의 부끄러움도 잊은 채 젖가슴을 드러내어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것은 생명을 품는 고귀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동해에서 해돋이를 보면 설레고 희망이 들지만, 서해에서 해넘이를 보면 차분함과 아늑함이 감돈다.

▲ 물 빠진 갯벌에 선 한 그루 나무
ⓒ 박종인
고향엘 가면 동호해수욕장엘 자주 간다. 어려서부터 바닷바람을 맞은 탓에 뭍 쪽으로 기울어져 자란 해송이 인상적인 곳이다. 그곳에 가면 바닷바람이 먼저 귓불을 스치며 알은체를 하고 재잘거리는 파도소리가 환영식을 펼친다.

내 눈길은 가능한 멀리 두려 한다. 적어도 거기엔 내 눈길을 가로막는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눈길은 고작 십 리도 못 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만다. 매양 가까운 것만 보며 살다보니 닭장 속의 독수리처럼 재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동호해수욕장의 해당화 동산은 가장 아름다운 해넘이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하늘엔 구름이 까치놀로 물들고, 바다와 갯벌은 햇빛을 흩뿌리며 찰랑거린다. 굼뜬 낮의 해와 달리 해질녘의 해는 뒤 마려운 강아지마냥 부리나케 이부자리로 숨어버린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아쉽기도 하다.

▲ 동호해수욕장
ⓒ 박종인

▲ 동호해수욕장 해넘이, 구름에 가려 또다른 모양
ⓒ 박종인
건 형(兄)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알짜 서울뜨기다. 이번 설에 내가 고향에 간다고 하니 같이 가자고 해서 데리고 갔다. 건 형은 시골의 설 풍경을 궁금해 했지만 요즘 시골은 왁자지껄하던 예전 같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풍습이란 사람이 만들어서 사람이 이어받는 것인데, 지금 시골은 전통의 연결고리가 끊긴 상태이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형을 데리고 바닷가로 갔다. 고창군 해리면의 동호해수욕장에서 상하면의 구시포해수욕장까지 해안도로를 공사중인데, 이 구간 중에 백사장이 십리나 펼쳐진 ‘명사십리’라는 곳이 있다. 물이 빠지면 모래사장 위를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얘기를 형에게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보진 못했다.

바람이 엄청 불어 추운 날이다. 내 차로 백사장을 달려보기로 하고 어림짐작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구시포에서 동호 방향으로 새로 난 길을 가다보면 바다로 들어가는 나들목이 있다. 이미 몇몇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기에 나도 모래사장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차는 모래사장 위에서 잘 굴렀다.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길 아닌 길을 신나게 달렸다. 한 오리쯤 달리다 다시 커다란 부표 같은 게 있고, 밧줄이 쳐져있다. 아마도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신호 같은데 난 무시하고 달렸다.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난 듯 이상하더니 바퀴가 모래에 빠지기 시작했다. 10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는 밀물이 으르릉 거리며 다가오고, 차는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저 바다 술래에게 잡히면 내 차는 끝장이다. 119를 불러도 여기까지 구조 오기 전에 바닷물은 차를 덥칠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표식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산을 오르든 길을 가든 사이사이 있는 표시들을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모래사장 위를 자동차로 달렸던 것은 짜릿하며 신난 경험이었다.

차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대강 오리(2Km) 가량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백사장 위의 드라이브를 즐겨봄도 괜찮은 추억이 될 것이다. 주의할 것은 다른 차들의 바퀴자국이 있는 곳까지만 가라는 것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 맛 : 가리맛과와 긴맛과의 조개의 총칭, ‘가리맛’의 준말
* 메밀꽃 : 파도가 일었을 때,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
* 알섬 : 육지 가까이에 있으면서 물새가 모여 알을 낳는다는 섬(알림)
* 알짜 : 여럿 중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훌륭한 물건
* 여 : 수면 위로는 보이지 않지만 바다 속에 내밀고 있는 암초(숨은여)
* 죽살이 : 죽음과 삶. 죽고 삶을 다투는 고생.
* 조금 : 음력 매달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조수가 가장 낮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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