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을 경유했던 독일에서의 1박2일은 한국땅에서 사는 한 다시 경험하기 쉽지 않은 속도감을 즐긴 여정이었다. 뮌헨을 출발해서도 우리는 160km/h 이상으로 체코를 향해 계속 북진했다. 국경이 다가오자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한 것은 체코가 아직 유럽연합이 아니라서 국경 검문이 있고 통화도 달라서 바꾸어야 하며(유로->크로네) 국경에서 바로 고속도로 통행권을 구입해 앞유리창에 부착한 뒤 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하는 필자로서는 이런 일이 닥칠 때마다 긴장을 하는 탓에 늘 ‘한 번에 하나씩 침착하게’를 무슨 주술처럼 외우고 다녔다.
국경에는 군복인지 경찰복인지 하여튼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차가 톨게이트 같이 생긴 검문소에 진입하자 제복을 입은 두 명의 사람이 다가와 "패스포트" 하며 손을 내밀었다. 네 개의 여권을 받아든 그는 열려있는 운전석 쪽으로 우리를 한 번 들여다 보고 여권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손으로 가라는 표시를 하였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있는 주차장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 한쪽 편에 콘테이너로 만든 것 같은 허술한 건물 위에 체인지인지 익스체인지인지 하는 영어가 씌여 있어 환전을 하는 곳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잔돈이 남아 나올 때 시덥잖은 물건들을 산 경험이 있는지라 생전 다시 쓸 일이 없을 크로네를 얼마나 바꾸어야 할지 계산하느라 머리가 다 아팠다. 그러나 환전때마다 수수료를 내니 한푼이 아까운 우리로서는 머리 아픈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얼마를 바꿀까 하고 돈을 세고 있는데 어떤 서양아줌마가 지나가며 나를 보고 국경은 원래 환율이 좋지 않다고 귀띔을 한다. 순간의 선택이 뭐를 좌우한다더니 '아줌마 만세'다. 나는 오십 유로짜리 한 장만 달랑 바꾸었다. 프라하 캠핑장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기름값과 약간의 비용이었다. 고속도로 통행권도 사서 붙였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평이하고 순조롭게 일이 진행이 되어 통행권을 차에 잘 붙여 놓고도 뭔가 허전해서 출발을 머뭇거렸다. 그때 아내가 "왜 안 가" 하며 날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까닭없이 허전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트렁크의 짐과 자동차 상태를 여기저기 둘러본 다음 출발했다.
이웃해 있는 두 나라의 차이가 이렇듯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국 돈 때문일 것이다. 국경을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 먼저 여기는 체코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차선 고속도로는 이차선으로 줄어들고 포장상태도 엉망으로 바뀌었다.
지도에는 분명히 고속도로 표시가 있어 가는 중간중간 점검을 해보았지만 국경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도시인 플젠까지의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기야 다른 고속도로가 있으면 그 많은 컨테이너 차량과 캠핑카들이 줄줄이 느릿느릿 꼬리를 물고 시속 사십길로미터도 안 되는 속도로 갈 리가 없었다. 지도상만으로 거리를 측정하고 도로상태를 미처 예측하지 못한 탓에 또 한 번 어둠속에서 캠핑장을 찾아 헤매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길이 좋아지면서 그야말로 고속도로가 되었다. 우리 나라 길바닥에서도 교통체증 이유를 모르는 일이 다반사인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고속도로가 공사 중이었거나 아니면 새로 길을 닦는 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동구권의 나라라고 해도 국경을 통과하는 도로를 그 지경으로 내버려 둘리가 없지 싶었다.
프라하에 가까웠을 때는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가늘게 빗줄기까지 비치기 시작했다. 독일의 귀곡산장 사건 이후 야간운전에 대한 공포심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초행길에 맞이하는 어둠은 낭만적이지도 포근하지도 않았다.
캠핑장을 향해 가다가 주유소에 들어 지도를 구입한 뒤 여차하면 이 주유소에서 신세를 져야겠다 생각하고 계산대로 갔다. 지도에서 캠핑장 위치를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서 보여주자, 점원은 여기서 오분 거리라며 다 왔다고 한다. 소 뒷발에 쥐잡듯이 제대로 한 번 해낸 것이었다. 하기야 프라하 외곽의 복잡하지 않은 도로상태도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만약에 파리의 반만 복잡했어도 그 밤에 될 일이 아니었다.
프라하의 쏘콜캠핑장은 밤인데도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내 순서가 되자 이제는 처음처럼 버걱대지도 않고 말도 제법 귀에 잘들어와 여유있게 체크인을 하려고 가방을 열어 여권을 찾다가 나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권이 없는 것이다!
가방을 뒤지며 허둥대는 내게 직원이 체크인을 할 거냐고 묻고 뒤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은 나를 의아한 듯이 보고 있는데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줄에서 비켜나 의자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찬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권이 없었으면 국경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고 그 이후에 아무곳도 방문하지 않았으니 잃어버릴 곳이 없었는데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딱 한 번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을 뿐인데 여권과 현금은 다른 칸에 넣어져 있었으니 흘릴 확률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곳으로 왔는데….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고속도로 통행권을 붙이고 왠지 뭔가가 허전했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긴 줄이 끝날 때쯤 소식을 들은 아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아이들은 여권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중요한 건가 하는 얼굴이었다. 내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직원들이 더 걱정스러운 얼굴들이 되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은 필자의 걱정을 가중시켰다.
“여권이 없으면 나가지도 못하는데, 이 나라에서….”
세상에! 그날 밤 필자는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꿈을 다 꾸었다. 그 악몽을 깨워준 것은 둘째가 난생 처음 이층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지는 소리였는데, 어이없게도 떨어진 둘째는 놀라서 달려간 우리를 졸린 눈으로 보며 왜 깨웠냐는 듯 침대 난간을 붙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