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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넓은 맥주집 호프브로이에는 사람은 많았지만,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어 뭔가 흥청거리는 활기를 기대했던 필자를 실망시켰다. 모두들 조용히 앉아 말 소리도 크지 않게 소곤거리며 맥주들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술 자체보다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필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인데, 즐기는 분위기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긴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옆 사람 말 소리도 잘 안들리는 대포집을 찾는 것도 곤란하지만, 술 한 잔 마시며 흥을 돋구려는데 일식집에 들어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하려는 것 역시 짜증나는 일이다.

▲ 뮌헨의 타커첸 캠핑장
ⓒ 유원진
필자의 생각에 호프브로이는, 일상의 피곤한 일을 끝낸 뒤 가벼운 대화와 흥겨운 음악 그리고 즉흥적인 춤추기가 적당히 어우러져 아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술집인 듯했다. 부모와 같이 와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는 묻는 사람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면서 맥주와 콜라를 홀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대쪽이 왁자지껄 하더니 갑자기 음악이 바뀌었다. 바이올린의 빠른 템포가 경쾌하게 리드를 하더니 드럼을 비롯한 다른 악기들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대 뒤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유를 모르다가 나중에 사람들이 열광하기에 무대를 보니 너댓 명의 한국 사람들이 무대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 뮌헨의 호프브로이-뒤쪽으로 밴드가 보인다
ⓒ 유원진
그들을 보자마자 한국인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렇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의식중에, 외국에서 나라 망신시키는 한국인들 운운하던 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비행기에서 고스톱치는 한국인, 어디 가나 소리를 지르고, 서두르고, 몰상식하며 예의를 모르는 한국인…. 이런 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우리를 주눅들게 할 만했다. 그런데 이날은 아니었다.

그저 무료하게 혹은 무심하게 앉아 맥주나 홀짝이던 사람들은 ‘너 왜 이제야 왔냐’는 식으로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거기에 고무되어 한국의 젊은이들은 지루한 호프브로이를 뒤집어 엎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잠시 열광적인 곡들이 끝나고 무대를 맡고 있던 연주자가 뭐라고 물었을 때 다른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으나 ‘코리안’과 ‘저스트 매리드’는 비교적 또렷이 들렸다. 취하지도 어색함도 없었다. 다시 음악이 연주되고 호프브로이는 두쌍의 한국젊은이들에 힘입어 진짜 명성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그들을 축하하는 축배가 올려지고 모든 테이블에서 마치 당신들을 기다렸다는 듯, 젊은 사람들이 춤을 추러 무대 앞으로 나왔다. 곧 세계에서 모인 젊음이들은 하나로 어우러져 에너지와 평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른한 얼굴로 어기적거리며 쟁반을 나르던 청년들의 발걸음이 나는 듯이 경쾌해지고 우리 옆을 지나가던 웨이터 하나는 뜬금없이 내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윙크를 했다. 잠시 후에는 파이에 촛불을 꽂은 케이크도 등장했다.

나그네들이 하루의 여행을 끝내고 가지고 싶은 삶의 모습은 저런 것일 것이었다. 나도 함께 어울리고 싶었으나 조용할 때는 괜찮더니 음악이 커지자 둘째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필자하고 큰아이는 흥이 많아서(아내의 말을 빌자면 노는 기질이 있어서) 시끌벅적하게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아내와 둘째는 시끄러운 곳은 딱 질색을 한다(정숙한 여자와 선비의 차이라나?).

화장실을 가다가 호프브로이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젊은이와 마주쳤다.

“한국에서 오셨죠? ”

손을 닦으며 웃는데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예, 신혼여행 중이시라구요? 축하합니다.”

그가 그냥 웃었는데 아주 단정한 청년이었다. 나중에 캠핑장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때 화장실 앞에서는 그냥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잠시 앉아 있다가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서는데 무대쪽에서는 그들을 둘러싸고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밖에서 서성거리며 안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간간히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에 끌린 듯 호프브로이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필자가 사장이라면 그들에게 맥주잔이라도 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등뒤로 누가 가르쳐 줬는지 ‘대~한민국’이 ‘대~칸민국’으로 변질(?)돼 푸른 눈들에 의해 열창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가슴이 벅차 왔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였던 우리들이,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는 차라리 일본인이라고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의 주류가 되어 저들을 우리의 무대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천한 민주주의 역사는 고사하고라도 남보다 열 배 스무 배 힘들게 살아온 까닭에 눈치만 보고 다니던 우리들이 이제 세상사람들에게 우리의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 호프브로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거리연주회
ⓒ 유원진
다음날 아내와 아이들은 뮌헨 시내구경을 나가고 필자 혼자 햇볕아래 넓은 깔판을 펴놓고 이것저것 짐정리를 하는데 누가 "안녕하세요" 하길래 뒤를 돌아보니 승합차가 한 대 서 있다.

간밤의 신혼부부들이었다. 세상에! 신혼여행으로 캠핑장을 돌아다니다니. 그것도 여럿이서. 그런데 가만 보니 다섯이 아닌가. 좌석 뒤쪽에는 정리하지 않은 짐들이 산더미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고 남자 하나가 짐들 위에 누워 있었다.

“왜 다섯분이세요?”
“우리만 결혼했구, 얘들은 친구들이예요. 끝까지 따라 다니네요. 지겨워 죽겠어요.”

장난기 가득한 그의 눈은 '행복해 죽겠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었던 신부는 레게머리를 하고 팔에 가득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진짜 광고모델들이 따로 없었다. 그네들은 집시 같이 자유스러워 보였으나, 천박하진 않았다.

“어제 잘 놀았어요?”
“노는 거야 우리가 유럽애들보다는 한 수 위죠. 쟤들이야 놀 줄 아나요, 어디?”
“이제 어디로 가세요?”
“바로 파리로 갈거예요. 근데 혹시 파리 다녀오셨나요? 대부분 시계방향으로 돌던데…..”
“예”
“잘 됐네. 혹시 파리 지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나는 기꺼이 파리 지도를 꺼내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묵었던 볼로뉴캠핑장에 대해서 몇 마디 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파리야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하며 멀어지는 그네들의 차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면서 나는 저들을 꼭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유럽을 돌고 있으니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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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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