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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운 다섯 살'이란 말이 맞는가 봅니다. 성현이 놈은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언제, 어디서건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제 멋대로 까탈을 부린답니다. 이러다가 어디 한두 번 혼이 났는지요.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마구 맞아도 그야말로 맞을 때뿐이랍니다.

엉덩이가 아플 때는 '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하고 평소에는 가뭄에 콩나듯 사용하던 존댓말까지 하면서 맹세를 하건만 이 맹세가 단 한 시간을 가지 못합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녀석도 이제 웬만큼은 사물을 보는 눈이 트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녀석과 함께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갔습니다.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비디오는 얼마 전 우연히 보았던 <오세암>이라는 거였습니다. 처음, 비디오를 빌리러 가자는 말이 나왔을 때 녀석은 아주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면서 난리를 쳤습니다.

비디오는 아들놈의 잠도 울음도 가져갑니다

이 놈은 요즘 비디오에 폭 빠져 있답니다. 무슨 비디오냐구요? 녀석이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 재롱잔치 비디오랍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집에서 마련한 재롱잔치 장면을 비디오로 담아 놓았는데 녀석은 여기에 열광, 또 열광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말이죠, 아침에 늦잠 자는 녀석을 몇 번씩 깨우고 해도 일어나지 않을 때 재롱잔치 비디오를 틀어 놓으면 어느새 일어나 거실로 나온답니다. 특히 하늘 반 형들이 '야인시대'나 '사랑의 트위스트' 노래에 맞추어 하는 율동을 하는 부분에서는 아주 열광을 한답니다.

그래서 잠결에라도 '사랑의 트위스트'라는 노래 소리만 나오면 벌떡 일어나서 두 눈 가득 눈곱을 달고 잠도 못 다 떨쳐버린 모습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 비디오의 율동을 따라합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엄마한테 야단을 맞고 엉엉 울다가도 이 장면이 나오면 얼른 눈물을 닦고 두 볼에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냉큼 텔레비전 앞으로 와서는 율동을 따라 합니다. 그리고 율동이 끝나면 다시 그쳤던 울음을 울곤 하지요.

하여간 재롱잔치 비디오를 집에서 받아 본 이후에 녀석은 이 율동들을 수십번도 더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갈고 닦은 실력을 지난 설에는 녀석의 외가댁에서, 또 할머니 댁에서 마음껏 뽐내고 왔답니다.

물론 그날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지켜보던 어른들이 이제 좀 그만하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여러 차례 반복을 했습니다. 요즘 이렇게 비디오에 빠져 있다 보니 비디오 빌리러 가자는 말이 어디 심상하게 들렸겠는지요.

아빠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들뜬 마음에 걸음이 유난히 가벼워진 녀석과 함께 비디오 대여점에 갔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애초 내가 녀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비디오는 <오세암>이었습니다.

비록 녀석이 이야기의 전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중간중간 이해를 도와준다면 대략은 받아들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한 감동은 아니더라도 그냥 스쳐지나갈 정도의 여운만이라도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예상은 비디오 점에 들어가자마자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녀석은 얼른 비디오점의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만화영화 코너로 가더니 "어, 탑불레이드다, 이거 봐야지. 으응 호빵맨도 있잖아. 우와, 이거 알라딘이다" 하면서 아직 제 손에 닿지도 않는 높은 선반 위에 꽂혀 있는 비디오를 꺼내기 위해 의자위에 냉큼 올라가더니 마구 마구 뽑아제칩니다.

녀석에게 선수를 빼앗긴 나는 한동안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서는 <오세암>을 꺼내 들었습니다.

'성현아, 우리 오늘은 이것 보자. 이게 아주 재밌다더라'하고 다소 목소리를 내리 깔면서 위엄을 세워 말을 하는 데에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야, 아니야, 호빵맨이 훨씬 더 재밌어" 합니다. "어허, 이게 더 재밌다니까. 이거 빌리자"하고 녀석을 거듭 설득하는 데도 녀석은 "아니야 난 이거 빌려야 돼. 난 이거 볼 거야' 하고 맞고집을 부립니다.

"그건 재미가 없다고 그러던데, 그리고 그건 너처럼 어린 아이에겐 빌려 주지도 않아" 하고 급하게 둘러대면서 녀석의 고집을 꺾어보려고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아냐, 이거 어린이집에서도 봤어, 얼마나 재밌다구. 우리도 볼 수 있어" 하면서 자기가 고른 비디오를 새삼 바라보면서 확인을 합니다. "임마, 그래도 오늘은 이거 봐야 돼. 아빠가 이것 빌려준다고 했잖아."

내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하는데도 녀석은 자기가 고른 비디오를 가슴에 꼭 안고서는 막무가내로 버팁니다. 내가 다시금 정색을 하고 목소리에 더 더욱 힘을 주며 "성현아!" 하고 압력을 가하는데도 녀석은 들고 있는 비디오를 내려놓을 생각을 않습니다.

"성현아, 그거 빨리 제자리 꽂아 놓아." 내가 다시금 재촉하자 이 녀석이 내 목소리에 담긴 단호한 의지를 알아 차렸는지, 아니면 제 고집이 통하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는지 갑자기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빠, 미워"를 외치면서 들고 있던 비디오를 옆 선반에다 아무렇게나 획하고 던지다시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나가 버립니다.

이쯤 되니 나로서도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난 될 수 있으면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다섯 살 난 녀석의 아빠로서 위엄을 살리려 했는데 그만 녀석의 신경질 섞인 울음소리 한바탕으로 그런 힘겨운 노력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얼른 주인아저씨에게 미안하다는 눈짓 인사를 하고서는 녀석의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아들 놈 눈높이에 맞추며 살자

아직 화가 덜 풀린 듯한 녀석에게 야단을 치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아 녀석의 손을 잡고 말없이 집으로 걸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난 녀석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더라도 순간의 재미가 아닌 무언가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비디오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빠의 교육적 의도를 녀석이 충분히 수긍을 하며 따를 줄 알고 녀석을 데리고 비디오점에 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녀석은 처음부터 어린이집에서 보았던 '재미난 비디오'만을 생각하고 나를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녀석과 나는 처음부터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아빠의 욕심과 아들의 욕심이 맞섰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아들 녀석은 아빠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면서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였답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 욕심이 충족된 것도 전혀 아니구요.

아무튼 난 녀석의 버릇없음에 대해서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은 아주 심란해졌습니다. 다섯 살난 녀석이 벌써부터 제 고집대로 하려는 심보가 괘씸하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무어라 하면 냉큼 말귀를 알아듣고 그대로 따르는 게 아들된 도리가 아닌가 하는, 다섯 살난 녀석에게 기대하기에는 다소 무리인 듯한 바람을 기준으로 녀석의 맹랑한 행동을 다시금 떠올리자 아빠의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아 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방금 전 상황을 해석해 보니 또 다른 심란함이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혹 내가 벌써부터 녀석을 내 욕심대로 키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내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녀석이 보려고 했던 비디오가 그렇게 불량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난 무조건 아빠의 권위를 내세우며 어린 아들에게 내 뜻을 강요하기에 바빴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딥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아들에게만은 녀석의 눈높이에 맞추어 녀석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줄 것을 꼭꼭 다짐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나 자신에 대한 화는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벌써부터 나는 녀석에게 내 생각과 믿음에 따라 녀석이 행동하고 따라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흔히들 말하듯 부모 욕심대로 아이들을 기른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역시 그렇게 내 아들을 부모 욕심껏 기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아직 한 아이의 부모가 되기 전에는 다른 집 자식들이 제 부모들의 잘못된 욕심에 따라 커가는 모습을 보고 그 부모의 양육태도에 대해 내심 비판도 하고 대놓고 한숨도 쉬었습니다만 이제 내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 있다보니 어느새 나도 자식에 대한 무분별하면서도 맹목적인 욕심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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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기자'라는 낱말에 오래전부터 유혹을 느꼈었지요. 그렇지만 그 자질과 능력면에서 기자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끝에 내린 결정은 일단은 사회적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생각도 이야기 하는 게 그나마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치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습니다. 그저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고 책임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글쓰기 분야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상의 흔적을 남기고자 자주 써온 일기를 생각할 때 그저 간단한 수필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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