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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는 용돈을 모아 케이크를 사고
ⓒ 한성수
나는 어제(3월 7일) 아침 여느 날처럼 엄니께 전화를 합니다.

"막내야! 오늘이 니 생일이 맞제? 오늘 새벽에 목욕을 하고 정신을 드렸다."

어머니께서 생일을 잘못 아셨나 봅니다. 아마 2월 초하루가 할머님 제사이므로 올해 정월달이 29일인 줄 모르고, 할머니 제사 이틀 전이 제 생일이라고만 기억하셨나 봅니다.

"추운데, 목욕은 뭐 할라꼬 합니꺼? 그라고 제 생일은 내일입니더."
"그렇나? 나도 언자 늙어서 정신이 없능갑다. 내일은 며느리가 니 생일 밥을 챙겨 주어야 할 낀데, 고마 전화 끊자."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생일을 잘못한 것이 무안한지, 목소리가 떨리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습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3월 8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봉사위원선거가 언제인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은 오늘이 봉사위원 선거를 하는 날인데, 어제 담임선생님께서 "봉사위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2분간 봉사위원으로서의 각오를 발표해야 한다"고 하신 모양입니다. 도저히 2분을 말로 채울 자신이 없던 아들은 제 엄마에게 봉사위원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너무 쉽게 허락해 버린 모양입니다.

나는 화가 나서 마누라가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아들의 소심함을 나무랍니다. 그런 후에 나는 봉사위원이란 반 친구들을 위해서 그야말로 봉사하는 자리이므로 마음이 넓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우리 아들이 봉사위원을 해야지 누가 하겠느냐고 추켜세웁니다. 그런 후에 아들에게 연설문을 적어 보라고 합니다.

나는 아들이 적어온 연설문을 조금 고쳐서 발표를 시킵니다. 숫기가 없는 아들은 발표를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시선은 땅바닥을 향합니다. 나는 다리를 반보 가량 벌리고, 주먹을 살며시 쥐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단어는 또박또박 끊어서 자신감 있게 말하라고 일러 줍니다. 몇 번 연습을 시킨 후에, 집을 나서면서도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퇴근을 하니 처제와 마누라가 음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웃들을 부르려다가 부담이 될까 싶어서, 우리끼리 저녁을 먹기로 했어요. 괜찮죠?"

마누라는 생글거리며 내게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편지를 전해 줍니다.

'아버지, 저는 이번에 실용적인 선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어요. 케이크는 딱 두 조각만 드십시오. 그리고 지금부터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겠어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딸아이는 용돈을 모아 생일 케이크를 샀나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두툼한 뱃살을 염려해서 굳이 두 조각을 강조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납니다.

처제는 선물이라며 네모난 상자를 건네는데, 옆에 있던 초등학교 3학년인 이질 녀석도 "용돈으로 이모부의 양말을 샀다"며 건네줍니다. 나는 감격해서 볼에다 입을 맞춥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대신 저는 뽀뽀를 해드리겠습니다."

아들은 싫다는 나를 쫓아와서는 기어이 입맞춤을 하고 맙니다.

"그건 그렇고, 아들! 오늘 봉사위원 선거에 나가기는 했냐?"

나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묻습니다.

"그럼요.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간단히 인사를 하라고 해서 연습한 것을 써먹지도 못하고, 그냥 '저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열심히 일하는 우리 학급의 머슴이 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나는 아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생일선물이라고 치하해 줍니다.

우리들은 둘러앉아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자릅니다. 마누라는 정성껏 차린 생일 상을 내어 옵니다. 그리고 처제식구들에게 아들의 봉사위원 사건을 웃으며 얘기하면서 맥주를 한잔 가득 따릅니다. 나도 마누라에게 잔을 채워주고, 우리는 모두 잔을 높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근처 생맥주 집을 찾았습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생맥주 500cc 두 잔과 안주로 한치 한 접시를 시켰습니다. 싹싹한 주인 아주머니는 단골인 우리 부부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는, 옥수수 튀밥 한 소쿠리를 서비스로 내 놓습니다.

▲ 한밤중에 우리는 생맥주집을 찾았습니다.
ⓒ 한성수
맥주 잔을 비우니 새벽 1시가 넘었습니다. 우리는 태진아의 '동반자'를 부르며 집으로 향합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당신과 만남이었어"

가슴에 와 닿는 가사가 중년을 넘어서는 우리 부부를 행복으로 휘감습니다. 내 생일도 흘러갑니다.

처제 식구들의 축하, 아들의 뽀뽀와 봉사위원 당선, 딸아이의 케이크와 굳은 다짐, 마누라의 정성스러운 음식과 변함 없는 사랑, 무엇보다 늦둥이 이 막내아들을 위해 몸을 정갈히 하신 후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 하늘을 바라보는 여든 일곱의 어머니. 이 볼품 없는 사나이가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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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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