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이어 또 편지를 띄웁니다. 이번 글에서는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비롯한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해 북의 선택에 대해서 제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앞선 편지에서 북이 '악순환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북이 핵무장화와 6자회담 불참을 고수할 경우 미국의 실질적인 정책 변화의 효과는 거두지 못하면서 북의 안보적·경제적 불안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경제적·군사적 위협이 커지면 북은 군사적 억제력 강화 차원에서 부족하기만 한 인적·물적 자원을 더욱더 군비에 투입할 것이고, 북이 군비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수록 미국 등 외부 세계는 "북은 변하지 않았다"며 대북적대정책을 정당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북은 안보와 경제 두가지 모두에서 심각한 불안에 시달릴 것이며, 이는 북의 인민은 물론이고 한반도 전체 주민들의 생존권을 불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정일 위원장께 현명한 판단을 요청드린 것입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도 핵무장이 결코 북의 안보적·경제적 우려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동시에 적대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김 위원장께서 인정하셔야 할 것은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최선을 기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최악을 피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최악을 피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북이 '피(被) 포위의식'에서 벗어나 기존의 대외정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가지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는 6자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해 협상과 타협을 누가 거부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핵 억제력'보다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6자회담, 북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먼저 북은 6자회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6자회담과 관련해 미국이 북과의 직접 협상을 회피하고 시간 끌기와 명분 축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이 6자회담에 적극 참여해 문제 해결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회담에 불참하는 것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북이 6자회담 조건부 불참 카드를 가지고 미국의 정책 변화를 꾀하는 것은, 실효가 없는 반면에 미국에게 적대정책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면서 다양한 수단의 대북 압박 및 제재를 강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6자회담에 불참하게 되면 오히려 미국의 시간 끌기와 명분 축적이 더욱 용이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북이 6자회담장에 나와 자신의 제안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면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한계'란 3차례의 6자회담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4차 회담에서도 미국의 정책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회담 불참보다 장점은 있습니다. 북이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밝히면서 기존의 제안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는데 미국이 계속 적대정책으로 일관한다면, 상황 악화 및 문제 해결 지연의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과 러시아는 북의 핵포기와 "합리적인 우려 사항들"이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합니다. 이는 북이 회담 참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여줄수록 북이 아니라 미국이 국제적으로 압박을 받는 구도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 안팎에서 부시 행정부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는 회담에 불참하는 것보다 회담에 참가해 북의 주장과 논리를 펴는 것이 미국의 정책 변화를 위한 분위기와 여건 조성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악을 방지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혹시 김 위원장께서 6자회담에 참가하는 것이 "핵 억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잃는 것이라는 판단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앞선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북의 핵무장은 군사적 억제력의 측면에서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반면에, 한반도와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미국의 북폭론과 맞물려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매파들은 북의 핵무장을 '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길 것입니다.
'핵 억제력'보다 '정치적 억제력' 추구하시길
저는 북이 '핵 억제력'보다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하는 것이 확고한 비교우위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정치외교적 맥락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시도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미국의 군사 행동 가능성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추가적인 대북 제재와 봉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이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면, 미국이 대북 제재나 군사 행동의 명분을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국 내부와 국제사회의 동의를 확보한다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를 '정치적 억제력'이라고 부르고자 하며, 북의 전략적 선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북미 갈등의 해결 틀이 6자회담이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미 미국은 이 회담을 통해 북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다자간 안전보장, 경제제재 및 테러지원국 해제 논의 개시, 한국 주도의 중유 제공 용인 등을 해줄 의사가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제안이 '동시행동'과 '일괄타결'을 요구해온 북의 제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북이 핵문제 해결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의 조치를 취하면 미국 역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것입니다. 이는 미국이 북에게만 한 약속이 아니라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다른 6자회담 참가국과 국제사회에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의 핵 포기 의사 천명의 상응조치로 다자간 안전보장을 받아내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억제력'은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북이 핵 억제력 대신에 정치적 억제력을 선택하는 것은 극심한 경제난, 특히 식량난과 전력난의 완화를 비롯한 경제 회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남, 대일 관계 개선의 '확실한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합니다. 이미 남측의 노무현 정부는 핵문제가 해결되는 맥락에서 '포괄적 대북지원'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도 임기 내에 북일수교를 완료하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말한 '포괄적 대북지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한국 국내의 정치적 복잡성과 대미 종속성을 고려할 때 이를 담보해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북한으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남북관계의 정상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울러 북일관계 개선에는 핵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인 납치 문제라는 또 하나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북으로서는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는데 일본이 북일평양선언을 비롯한 양국 사이의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김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른바 '가짜 유골'을 둘러싸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양국이 전문가 회의를 통해 진위 여부를 검증하자고 제안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제3국의 법의학 학자들의 참여도 가능할 것입니다.
남북관계 정상화의 중요성
무엇보다도 김 위원장께서는 대승적인 견지에서 당국자 회담의 재개를 비롯한 남북관계의 정상화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남북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쌓아가면서 서로를 배제할수록 외세의 영향력만 키워준다는 것은 불행했던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가장 큰 교훈입니다.
반면에 비록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그 빛이 바랬지만, 북미관계가 가장 좋을 때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였습니다. 남북이 '평화지향적인 민족공조'에 나설 때, 외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도전이자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북측으로서는 남측에 대해 여러가지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노무현 정부가 한미공조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대북관계를 홀대한 것이 커다란 실책이었다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나 대승적인 견지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원화된, 특히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커다란 이견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남측 사회에서 정부나 특정 정당이 대북정책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민족공동체 운명은 타자화(他者化)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지금까지 여러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고 북을 도우려고 하는 선의(善意)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럴 때 북에서 호응을 해준다면, 서로 오해와 불신을 털어버리고 남북관계를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습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김 위원장께서 초청하신다면 핵문제를 비롯한 민족의 장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계십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혜안을 보여주고 계신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김 위원장에게 가장 훌륭한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 비교할 수는 없었겠지만, 1994년 6월 김일성 주석께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 정세를 극적으로 반전시켰던 지혜가 또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님과 노무현 대통령께 권고해서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정치외교는 '가능성의 예술'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북이 한다고 해서 '다른 미래'가 열린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높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흔히 정치외교를 가리켜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거대한 구조에 맞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거대한 구조란 분단과 함께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는 괴물은 남북이 서로 헐뜯고 무기를 축적해가는 과정에서 더욱 큰 힘을 갖게 됩니다. 북의 '핵 카드'도, 남의 '자주국방'도,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양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습니다. 또다시 대결의 늪에서 한반도의 주민들이 생존의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김정일 위원장님의 현명한 선택이 요구됩니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적개심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뛰어 넘어,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05년 3월 9일 민족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염원하며
정욱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