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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저녁 SBS의 열린우리당 당권주자 초청 토론회를 보면서 기자는 비애에 젖었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도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일까?

토론회에서 당권주자들은 '평생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이 누구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부분 김구·DJ·노무현 대통령을 꼽았다. 사실 백범의 경우는 너무 식상하다(그의 훌륭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또 DJ·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데는, 물론 진심도 없지는 않겠지만,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한 백범의 인기, 가장 무난한 지도자이기 때문?

▲ 백범 김구
ⓒ 오마이뉴스
잠시 토론회로 돌아가보자. 가장 먼저 답변에 나선 당권주자는 김두관 후보였다. 김 후보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47)임에도 불구하고 백범을 사표로 제시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살아온 과정을 굉장히 존경한다. 다만 그분이 해방 이후 타협하지 않아 정국을 주도하지 못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김 후보는 "작년에 (임시정부 궤적을 따라) 상하이에서부터 중칭까지 1만3000리를 현장답사했다"며 진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이어 김원웅 후보도 백범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김 후보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원칙을 지킨 것은 우리가 귀감을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원하는 나라의 모습은 무력이 강한 나라도 아니고, 경제가 풍요한 나라도 아니라고 하면서, 한없이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고 해서 (저에게) 감동을 준다."

대개 국민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곤 하지만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백범을 거론한다. 특히 5년마다 치러지는 대선에서 대권주자들은 백범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의 첫손에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좌우 그리고 남북을 아우렀던 백범의 정치행보가 그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겠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백범이 가장 무난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주 정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남북분단 상황에서는 더욱 더.

백범의 인기는 유일한 여성후보인 한명숙 후보에게로 이어졌다. 한 후보는 "제가 백범 선생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옆에서 먼저 말해버렸다"며 아쉬움을 토해냈다. 그는 "DJ를 사표로 삼고 싶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특별히 '대중보다 반발짝만 앞서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은 참 맘에 든다. 존경한다."

DJ·노무현 등 전현직 대통령 집중 거론... '노심' 이용한 득표전략?

▲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과 노무현 대통령
ⓒ 오마이뉴스
이어 문희상 후보도 "두 분이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다 선점해버렸다"고 웃음을 터뜨린 뒤 DJ를 사표로 제시했다.

"그분은 내가 초선의원 때부터 '정치가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같이 갖추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섞은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다는 측면에서 공감한다."

현재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전직 대통령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개인적 인연은 물론이고 득표를 위한 정치적 노림수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DJ 정부 시절 한 후보는 국회의원과 여성부장관을 지냈고, 문 후보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국정원 기조실장 등 요직을 거쳤다. 또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DJ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고 할 때 'DJ 불러내기'를 득표에 활용하려는 속셈도 없진 않을 것이다.

송영길 후보는 아예 'DJ와 노 대통령의 통합'을 사표로 삼고 싶다고 밝혔다. 송 후보는 "한반도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참 존경한다"며 "그것이 자기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투여하는 자세를 가진 노무현 대통령과 잘 통합되는 것을 사표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또 장영달 후보도 존경하는 인물로 DJ와 노 대통령을 동시에 꼽았다. 다음은 두 사람에 대한 장 후보의 예찬론이다.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자기 원칙을 지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바통을 이어받아 강대국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남북화해협력을 지켜가는 노무현 대통령은 훌륭한 지도자다."

이어 답변에 나선 염동연 후보가 "이하 동문이다"라고 말해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정무특보를 지낸 염 후보는 "노 대통령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 '항상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한껏 비행기를 태웠다.

이런 정도에 이르면 거의 '용비어천가'에 가까운 수준이다. 당권주자들은 이번 당권경쟁엔 '노심은 없다'고 한결같이 주장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노 대통령을 팔아 표장사 좀 해보겠다는 속내가 언뜻언뜻 엿보인다.

유시민 후보의 색다른 답변 "이해찬 총리를 존경한다"

▲ 이해찬 국무총리
ⓒ 오마이뉴스 이종호
8명의 당권주자 중 유일하게 유시민 후보만이 색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유 후보는 "훌륭한 사람들은 앞에서 다 말해서 저는 그렇게 말하면 안될 것 같다"고 '차별화된 답변'을 예고한 뒤 자신의 사표를 이렇게 공개했다.

"(김구·DJ 등에 비해) 좀 (지위가) 낮지만 정치인 중에선 이해찬 총리를 존경한다. 그분이 현직 총리라 귀가 간지럽겠지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필요한 일을 제 때 제대로 잘하기 때문에 저도 일 잘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

이 총리와 유 후보는 대학과 민주화운동의 선후배 사이다. 특히 그는 13대 국회 당시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다. 또 한때 그가 노 대통령에게 이 총리를 국무총리로 천거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이 총리를 자신의 사표로 꼽은 데는 이러한 '각별한 인연'이 작동한 것일 수도 있다.

기자를 비애에 젖게 한 토론회가 끝난 다음날(17일) 김두관 후보와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 끝에 전날 토론회 이야기를 꺼냈더니 김 후보는 "나도 답을 해놓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며 "개인적으론 항불·항미활동을 한 호치민의 삶의 역경을 존경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김 후보는 "해방 이후 (정치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으로 각인돼 있다"며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마오쩌둥이라고 답해서 좀 시끄러웠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대부분의 당권주자들은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진짜' 사표가 될 만한 인물들도 만났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운동에 헌신한 한명숙 후보는 여성의 날을 만든 '클라라 체트킨'을 자신의 사표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치인들이 솔직해지면 2007년 대선은 '너무도 식상한 혹은 너무나 정치적인' 존경하는 인물과 결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상상이 비애에 젖은 기자를 다시 즐겁게 한다.

덧붙이는 글 |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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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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