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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난 6시에 태어났고 2분 후 25살이 된다. 역사적인 순간에 난 뛴다.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졌다. 기분이 아주 좋다. 오늘은 삐삐가 올 일이 없겠지…."

"1994년 5월 1일 한 여인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난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이 통조림은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굳이 유효기간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해야지"


▲ 한텔에서 제작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삐삐들
ⓒ 김정은
비록 영화 <중경삼림> 속에 나온 멋들어진 대사는 아니더라도 '삐삐(무선호출기)' 세대라면 누구나 한 가지씩 가슴 떨리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삐삐가 울리고 무심코 확인한 숫자가 만약 '1010235(열렬히 사모)'나 '17171771(I LOVE U)' 아니면 '177155400(I miss you)'일 때 그 설렘과 기쁨이란…. 지금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는 흉내 낼 수 없는 둘의 은밀하고 짜릿한 감정의 교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휴대폰이 빠르게 보급되고 삐삐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우리는 은밀한 고백보다는 직설적인 고백을, 기다림과 설렘보다는 당장 만나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급증을 갖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인들은 휴대폰 모닝벨 소리로 아침잠을 깨고 지하철 안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고, 약속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휴대폰으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게 되었다. 혹 상대방이 휴대폰을 받지 않기라도 하면 더 불안해하고, 문자를 날리고 답신 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답답해하며 휴대폰으로 확인하기를 몇 번….

이쯤 되면 휴대폰이 디지털시대의 이기라기보다는 또 다른 족쇄로 느껴질 법도 한데 휴대폰의 마력에 푹 빠진 사람들은 그 안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른다. 오히려 하루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금단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이 비록 소수지만 이젠 구경조차 하기 힘든 삐삐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휴대폰 대신 사용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삐삐 수출해 매년 330억원 번다?

이미 한물 간 물건 취급당하는 삐삐지만 연간 330억원의 수출고를 올리는 품목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한텔(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1동 513-13 소재)이다. 코스닥에 등록된 이 업체의 주력품목에는 MP3나 중계기 시스템 장비들과 함께 무선호출기(삐삐)도 당당하게 들어가 있다.

▲ 박종흥 한텔 생산기술팀장
ⓒ 김정은
박종흥 ㈜한텔 생산기술팀장은 우리나라가 지난 한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 중국 등지에 수출한 삐삐는 약 120만대로 전 세계 삐삐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휴대폰 전자파에 민감한 장비들을 많이 보유한 병원, 소방서 등 특수직종에서 삐삐를 이용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보안유지 및 통신요금 절약 차원에서 관공서 등에서도 삐삐를 이용한다고.

"원래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보니 기지국 세우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 당연히 휴대폰 이용요금이 비싸거든요. 그 뿐인가요. 발신자는 물론이고 수신자에게도 통화요금이 부과돼 관공서에서 통신비 절감을 위해 휴대폰 대신 삐삐를 이용하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복받은 나라인 것 같아요."

박 팀장의 말대로 2004년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삐삐서비스 가입자가 1100만명 정도라니 미국에서 삐삐의 시장성은 아직 괜찮은 편이다. 이러한 미국 삐삐 시장을 현재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대만이 나누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삐삐 이용 실태는 어떨까. 삐삐가 일반인들의 필수품으로 여겨졌던 1997년 당시 전국 가입자가 1500만명에 이르렀지만 8년이 흐른 올 2월 말 현재 유일한 무선호출서비스업체인 리얼텔레콤 삐삐 가입자는 약 3만5000명 정도. 국내에서 삐삐의 사업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텔이 100% 수출용으로만 삐삐를 제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 국내에서 삐삐를 구하기는 더 힘들다. 더군다나 최근 무선 호출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주파수가 달라져 삐삐도 새로 구입해야 하는데 국내의 경우 삼성이나 타키온 등 몇몇 회사가 캐릭터 사업 형태로 일부 주문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반 환경이 어려운 실태인데도 지난해부터 조금 조금씩 변화가 보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가입자가 급감하던 추세에서 지난해는 4500여명이 신규 가입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전년도(3000여명)보다 가입자가 50%나 늘어났다고.

짜증나는 스팸 전화와 쓰레기 같은 광고 메시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060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받지 않을 자유를 점점 박탈당한 휴대폰에서 벗어나 받고 싶을 때 받고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하는 취사 선택이 가능한 삐삐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 삐사모 정기모임에 참석한 회원들
ⓒ 삐사모 제공
휴대폰시대,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

"삐삐요? 가끔씩 잊기 쉬운 삶의 여유를 삐삐가 찾아준답니다. 바로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게 됐다는 거죠."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강동욱(30)씨는 다음 카페 '삐사모'(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http://cafe.daum.net/ilovebeeper)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삐삐 사랑파이다.

그가 삐삐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튀어 보이고 싶다거나 비용이 적게 든다는 식의 간단한 게 아니다. 삐삐를 사랑하는 그의 가슴 속에는 삐삐에 대한 설레는 추억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요즘에는 누구나 연락한 사람이 있으면 휴대폰을 꺼내서 바로 연락을 하면 되지요. 하지만 저처럼 삐삐만 있는 사람은 공중전화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휴대폰을 빌릴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이 시간이 몇 초가 되거나 아니면 몇 분이 되든지 간에 누구인지 모를 번호에 대한 궁금증과 설렘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죠."

그뿐 아니다. 삐삐에는 강씨의 대학시절의 꿈과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96년 과외비를 톡톡 털어 큰 맘 먹고 처음 삐삐를 샀던 날의 기쁨, 처음으로 삐삐에 메시지를 남긴 친구,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남긴 메시지 등등 여러 가지 추억들이 있죠."

강동욱씨의 이러한 삐삐 사랑에 동감하여 현재 삐사모 카페에 가입한 회원은 총 2300여명, 이들은 카페 게시판에 삐삐를 사랑하게 된 이유와 삐삐 번호를 올리고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정모 때는 소박한 장소에 모여서 밤새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고 영화나 연극을 보기도 하고 자원봉사를 하기도 하면서 느리다는 것, 남보다 천천히 살아간다는 데서 느끼는 삶의 여유와 기쁨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느림의 미학을 좇는 이들을 별종 취급하거나 구두쇠 내지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단정하고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직장인 K씨는 휴대폰 없는 그를 업무상으로 불편해하는 시선들을 견디다 못해 최근 휴대폰을 샀다.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휴대폰 없는 사람에게는 월정액으로 나가는 통신보조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회사 방침 때문.

그러나 휴대폰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면 사생활을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영 불편하고 아직 휴대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출근시 집에다 깜빡 두고 오기 일쑤이다.

삐삐 서비스가 존재하는 한 삐삐를 계속 사용하겠다는 강동욱씨도 작년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휴대폰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또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주변의 성화에 항복하고 휴대폰을 구입한 것일까? 휴대폰 구입에 대한 자세한 속사정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휴대폰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주된 통신수단은 삐삐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기도 벅찬 세상이지만 가끔은 지난 것에 대해서 뒤돌아보고 마음 속으로 깊이 되새김질 하며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아는 여유.

그것이야말로 삭막하고 영악하기만 한 디지털 사회를 따스한 인간의 온기가 스며드는 바람직한 디지털사회로 가꾸어 나가는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약간은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불편함조차 사랑하는 그들의 의지가 부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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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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