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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법국은 다시 ‘황제’라 칭하는 이가 다스리는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임 대장도 법국을 지금 ‘나폴레옹 3세’라는 이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수와 군관급 이상 지휘관을 대상으로 정말 지겹도록 계속 된 정세교육의 성과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 또한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하였기에 1851년 ‘쿠데타’라는 것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이나 그 과정에서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어야 했던 구체적 내용들은 떠올릴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도성만 점령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단순한 무력으로 집권한 후엔 끊임없는 수구세력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에만 여력을 쏟다가 정작 개혁을 위한 힘은 남아있질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힘이 소진되면 어느 순간엔가는 왕을 자처하는 누군가에게 권력을 넘겨줘야 하겠지요.

게다가 그런 시기에 외세가 개입한다면 그야말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태로 치닫게 되겠지요. 그러나 백성들의 깨우침으로 이 나라가 한 차례 깊은 몸살을 앓기만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백성들 스스로가 들고 일어나 폐습(弊習)을 타파하고 악제(惡制)를 개혁할 의지만 보여준다면 그 다음엔 그 어느 권력도 백성을 배제한 채 군림하려 들지 못할 것이고, 단합된 백성의 힘 앞에서는 외세도 쉽게 끼어들 틈을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온 백성을 자각하게 하는 도화선 역할을 우리 대동계가, 그리고 우리 개화군이 해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복안도 이미 다….”

권기범이 열정에 도취되어 자신의 포부를 밝히려하자 임치수가 얼른 말을 막았다.

“아, 됐습니다. 영수님. 또 그 통령(統領)이니 의회(議會)니 하는 복잡한 것들을 말씀하시려고요? 아휴, 전 됐습니다. 전 그런 복잡한 것 모릅니다. 그저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을 뿐입지요.”

“고맙소이다. 임 대장.”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병(兵)이 장수의 말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영수님은 저희 계의 장수이시니 의당 명에 따를 뿐입니다. 기꺼이 삼남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어찌해야 하는지요?”

“흑호대를 증편하고 조련하는데 대략 두어 달 가량이 소요되리라 봅니다. 꼭 한 번에가 아니더라도 준비가 되는 초부터 순차적으로 출발합니다. 삼남 지방엔 유민이 화한 화적떼들이 창궐하고 있는데 그 중엔 우리 계가 이끄는 패도 꽤 됩니다. 허나 속속들이 힘이 닿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 쪽으로 화한 패거리 중에도 통제권 밖에 있는 치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세요.

그 후엔 차차 주변 도당을 규합하여 추후 삼남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킬 때 주력의 역을 맡아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전까진 탐관오리와 백성에 대한 탐학을 일삼는 토호들을 징치하여 민심을 얻고 계의 물적 후원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삼남의 화적을 ‘활빈도’라는 이름으로 규합하여 따로이 세력을 만든다면 이 곳 평안도 일대에 집중된 우리 세력이 노출되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힘이 조선 전역에 미치게 됨은 물론이고요. 그만큼 이번 흑호대의 역할이 중차대하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3개 초를 남겨 놓고 7개 초만 움직인다 함은 고작 200여명으로 삼남 각지의 수십 개 처에 흩어야 할 것인데 무리가 아닐는지요?”

“하하하하. 일당백을 자랑한다는 흑호대의 수장이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 생각엔 흑호대 200이면 궁궐도 들이칠 수 있으리라 보는데요.”

“물론 조선의 궁궐 뿐 아니라 자금성을 들이치라 해도 능히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허나 영수님께오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점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키는 일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궁궐을 지금 들이치지 않는 것이지요.”

“하하하. 농으로 그냥 해본 말입니다. 200여 군세를 처음부터 흩뿌리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리 쪽으로 화한 패거리들 중 흔들리고 있는 도당을 먼저 장악합니다. 그런 곳을 중심으로 각 도에 한 군데 이상의 거점을 확보하고 늘어난 세를 이용해 하나씩 점해 나가면 될 겝니다. 물론 거점 확보 시까진 제가 함께 합니다. 어차피 그 쪽에서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요. 상황에 따라 개화군의 지원을 고려할 수도 있으니 절대 사람의 수효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기한의 말미는 넉넉하단 말씀이시군요.”

“예, 적어도 내년 봄 안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삼남으로 향하는 흑호대는 주무장이 신식 보총이 아닌 화승총이 되리란 점입니다.”

“짐작은 했습니다.”

“예. 아무래도 계속 민간의 무리 속에 섞여 활동해야 하고 워낙 각지에 흩어져 속을 알 수 없는, 흡수된 화적당과 있으니 통제의 문제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삼남의 각처로 총환의 보급을 유지하는 일도 힘든 일이 될 터이니 병영이나 관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자로 무장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다만 한 개 초에 한 개 오정도만 보총과 산총으로 무장하고 각 오의 오장들에게만 오혈포를 지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출발 전까지 그만한 수량이 준비가 될는지 모르지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아시고 개편을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원로들께서 어떤 자세를 취하시든 다른 이들이 무어라 하든 개의치 마세요. 저는 임 대장님만 믿습니다.”
권기범은 이 말을 인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려마십시오. 영수님. 제 목숨을 살리시는 이도 영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오직 영수님 뿐이십니다.”

막사 밖으로 따라 나서며 임 대장이 말했다. 금위영에서 처우 문제로 인해 반란이 있고 나서 나서 목숨을 건진 이라고는 임치수, 그리고 그의 수하로 있던 점백이와 함께 권기범의 세력 안으로 투신한 여남은 명의 군졸뿐이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목숨타령은 제가 임 대장님께 해야 할 몫이 아니던가요? 하하하.”

경신년 대동계 토포 당시 권기범의 의기와 아까운 재주를 높이 사 의금부로부터 빼내 준 것에 대한 권기범의 인사였다.

막사를 빠져 나와 십 리도 넘게 떨어진 광산쪽으로 향하는 권기범을 임 대장은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싸인 오솔길에 접어들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임 대장에게는 권기범이 공간과 시대를 뛰어넘은 그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다.

초월적 존재는 아닐지라도 두발은 굳건히 땅을 딛되 눈은 항상 하늘을 향하는 거목이었다. 굽이치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원대한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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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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